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더도 아니고 겸손한 만큼만 회개할 수 있다.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1-25 조회수704 추천수7 반대(0) 신고

 

<더도 아니고 겸손한 만큼만 회개할 수 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마르 16,15-18)


  오늘은 바오로가 예수를 박해하던 박해자에서 예수님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열렬한 사도된 사건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교회는 그의 회두 사실만으로 축일을 선포할 만큼 바오로가 교회에 끼친 영향이 크다는 반증이겠죠. 바오로의 사상은 초기 공동체에서 부터 영향을 주었습니다. 바오로의 서간을 각 교회가 돌려가며 전례 때 낭독하였습니다. 마치 유대교 시나고가에서 구약의 토라와 예언서를 낭독하듯이 바오로 서간이 낭독되었습니다. 초기부터 그의 영향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오로의 서간이 신약 정경 목록에 속하게 된 것도 다 이러한 연유에서였습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바오로의 회두를 3회에 걸쳐 기록합니다. 그 사건을 하느님과 예수님의 적극적 개입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하여 구약의 모세와 예언자들이 겪었던 사건과 동일 선상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구약의 모세와 같은 반열에 올려졌습니다. 바오로는 구약의 율법을 예수님 안에서 완성하는 믿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여기서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내용은 체험의 순간이 한낮이었고, 목격자가 있으며, 목소리를 들으며, 빛을 보고, 땅에 엎어 졌다는 내용입니다. 구약에서 하느님의 영광은 언제나 빛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거룩함에 닥쳐서 모든 사람은 땅에 엎드리게 됩니다. 바오로의 체험이 의심할 바 없는 영광의 체험이라는 것을 밝힙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가거라. 나는 너를 멀리 다른 민족들에게 보내려고 한다.’”

  이로써 바오로는 복음 전도사가 되었고 그는 주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서간에 나타나는 바오로의 회두 이야기는 사도행전의 이야기와 달리 내적 체험인 듯 담담하게 그립니다.

존 F. 오그래디 신부는 그의 저서에서 바오로의 종교체험을 이렇게 분석합니다.

  * 종교 체험의 특징

1. 체험한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어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2. 정서(감정)와 관련되지 않고 반드시 이성적 통찰을 동반한다.

3. 순간적으로 일어나 완전히 회상하기 어렵다.

4. 전적으로 피동적이다.

기타. 여행과 빛의 체험, 인격적 만남도 종교적 체험에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사실을 근간으로 삼아 바오로의 체험을 비추어 본 결과 친서에 나오는 말들이 확실한 종교체험이라고 말합니다. 비록 사도행전과 같은 구체적 내용이 없더라도 박해자로부터 열렬한 복음 선포자의 변화된 삶을 살아간 그 자체가 그 증거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회두 사건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또 다른 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도 바오로와 같은 강렬한 하느님 체험을 하지 못해 이렇게 살고 있다고 핑계를 댑니다. 만약 우리도 그런 신비체험을 한다면 지금 보다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뻔뻔스럽게 말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친서인 갈라디아 1,16-17절에 나오는 바오로의 회개 고백 내용은 사실 그런 경험이 내적인 것을 말해줍니다. 어쩌면 다마스쿠스 회두 사건은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대로 그렇게 강렬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일찍이 그의 마음에 예수라는 분의 행적을 살펴보고자 하는 호기심 정도가 일었는지도 모릅니다.

  바오로는 예수의 행적을 자세히 묻고 들은 내용과 그 예수 일당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적 태도에 조금씩 감화 되었다가, 한순간 전광석화처럼 깨달음에 이르렀습니다. 그 후 바오로는 즉시 아라비아, 곧 나바테아 왕국에 들어가 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되새기며 앞으로의 삶을 정리 했을 것입니다. 사막에서 3년 동안 그는 예수에 대해서 관상했을 것이며 주님과 내적 일치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그동안 믿고 의지하며 살아왔던 모든 것이 뿌리째 흔들리는 경험을 처절하게 맛보았을 것입니다. 그럴수록 자신이 체험했던 그 빛의 계시가 절실하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사실 이와 같은 길을 밟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부르신다는 조그만 체험이 지속적 기도와 관상을 통해 내적 일치를 키우는 데까지 이르게 되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처음에 작았던 소명체험이 점차로 강렬해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바오로는 자신이 그동안 범한 죄를 뉘우치고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자기의 허물을 조금도 감추거나 미화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박해하던 죄를 낱낱이 고백하였습니다. 주님 앞에서 겸손을 실천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자기를 부르신 주님의 의도를 그대로 받아드렸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어려운 사명을 주저 없이 받아드렸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의 사도로 불림을 받은 것에 합당한 태도를 지키는 데 있어서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개종 축일은 우리에게 진정한 회개를 가르쳐주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어느 신부님 강론 말씀에 “더도 말고, 우리는 겸손한 만큼만 회개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신 것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회개하기 어려워하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 부족하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성덕을 쌓고 죄를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보다 자신을 낮추어 회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늘나라에서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는 사람 하나를 더 기뻐할 것입니다.” (루카 15,7)

  회개의 어려움은 겸손만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바오로 서간을 통하여 배우고 있습니다. 로마서 13장에서 “사랑마저도 빚” 이라는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은 정말 깊이 묵상할 내용입니다. 인간이 정말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베푼다고 여기며 사랑을 동정이나, 덕으로 여겨왔던 우리의 생각이 오만으로 밝혀졌습니다.


  참으로 아무것도 지니지 못한 우리의 가난을 고백해야하겠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마저도 빚을 갚는 데 지나지 않는다면 무엇인들 우리가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 개종 축일이 주는 가르침 속에서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끄심을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