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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월 28일 야곱의 우물- 루카 4, 21-30 묵상/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7-01-28 조회수548 추천수5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루카 4,21-­30)

사제수품 축하연 때의 일입니다. 태어난 첫 아기를 보고 ‘신부님!’이라 부른 부모님의 겸손한 신앙도 감동스러웠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늘 ‘형’이었다는 동생의 말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가까울수록 존경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함께 살다 보면 은근히 바라는 기대치도 높아서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부각되어 눈을 가리니까요. 오늘 예수께서는 단지 목수의 아들이란 것 때문에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십니다.

예수께서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한 뒤 고향 사람들은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곧바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예수의 신분탐색으로 넘어간 것입니다.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목수 요셉의 아들, 모두 별 볼일 없는 조건입니다. 혹시 유다 예루살렘 출신, 라삐의 아들이었다면 그분 말씀을 잘 받아들였을까요? 요셉이 돌아가신 뒤 예수께서는 직접 목수일을 하며 어머니와 함께 가난한 생계를 꾸려갔을 것이고, 성경 어디에도 공부를 많이 했다는 구절이 없는 것으로 보아 분명 변변히 내세울 만한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두번째 왕을 물색할 때였습니다. 사무엘은 다윗의 형 엘리압을 보고 ‘바로 그’라고 판단했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나는 마음을 본다”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생각지도 않은 다윗이 뽑혔습니다. 우리의 판단도 내면보다 외적인 것에 치중하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는지요? 만약에 신부님, 수녀님, 할머니 신자가 각각 다른 곳에서 같은 내용을 강의한다고 하면 나는 누구의 말을 제일 존경하며 받아들이겠습니까? 또 초등학교밖에 못 나온 우리 동네 구멍가게 집 아들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면 나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학위나 자격증에 집착하고 의존하는 한 우리도 ‘예수’란 ‘용’은 못 보고, ‘개천’에 비중을 두는 나자렛 사람들과 같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께서 현세적으로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데서 나온 메시아가 아니었다면 우리에게 메시아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의 반응을 예견이라도 하신 듯 기세에 눌리지 않으시고 대담하게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이 능력을 가진 예언자들이었지만 신뢰하지 않았던 자기 민족한테는 능력을 행사할 수 없었던 것을 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당신도 이 같은 처지에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자렛 사람들이 기분좋을 리가 없습니다. 감히 자신을 구약의 그 위대한 예언자에 비기면서 믿지 않는 자신들을 질책하는 듯하기 때문이지요. 군중은 이제 돌변하여 예수님을 마을 밖으로 내몰아 벼랑까지 끌고 가서 떨어뜨리려 합니다. 내몰고 끌고 가고 벼랑에 떨어뜨리려는 표현이 성난 군중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을 미리 보는 듯합니다.

공생활 동안 목자 없는 양 같은 백성을 말씀과 빵으로 배불려 주시고, 아픈 상처를 고쳐주었건만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바라빠는 풀어주고, 예수는 십자가형에 처하시오”라고 한 군중들. 조석으로 마음이 변하고 선동되기를 잘하는 어리석은 군중은 오늘 우리 시대에도 많습니다. 새만금, 천성산 도룡뇽, 그리고 평택 미군기지 이전, 한미 FTA 등에서 볼 수 있습니다. 진실에 대해 무지하니 권력과 힘의 논리에 쉽게 끌려갈 수밖에 없는…. 아무튼 공생활 시작부터 이러니 앞으로 예수님의 공생활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짐작이 됩니다.

예수께서는 폭력적인 군중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당당하게 떠나십니다. 그러면서 그 가운데 당신의 길을 내십니다. 참 멋진 장면입니다. “나는 길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은 우리도 그 길을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복음서 전체를 통해 예수님의 길을 제시하는데, 오늘 이 사건을 통해서도 그 길을 봅니다. 폭력과 악이 난무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것은 예수님의 운명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진리와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군중은 어찌하여 한 사람 예수를 벼랑에 떨어뜨리지 못합니까? 진리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정의는 승리합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처형한 뒤 승리한 듯 쾌재를 불렀지만, 예수님의 부활로 승리는 하느님의 정의로 돌아갔습니다.

이 일로 예수님은 더 폭넓게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나자렛을 떠나 다른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루살렘에 박해가 일어나자 신자들이 사마리아로 흩어지고 그 뒤로 교회는 오히려 확장됩니다. 또 유다인들이 바오로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그는 이방인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더 널리 전파하지 않았습니까? 어둠이 아무리 짙어도, 그리고 빛이 아무리 가늘어도 빛은 어둠을 이깁니다.

우리는 각자의 인생을 엮어가는 내 삶의 주인공들입니다. 따라서 주변이 아닌 한가운데 삶을 살아야 합니다. 비록 모순과 무지와 이기심이 가득한 생활이지만 그 한가운데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산다면 그분은 분명 승리의 길로 나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에 계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는 위대하시다”(이사 12,6).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 머무르리라”(즈카 2,14).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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