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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어떠한 예언자도'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7-01-28 조회수552 추천수4 반대(0) 신고

<어떠한 예언자도>(루가4,24-30)

 

 "어떠한 에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다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오늘 화답송에서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제 영혼, 하느님을 그리나이다. 제 영혼,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건만, 그 하느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까"(시편41)라고 기도하였듯이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을 잃어버린 인간의 간절한 바램이다. 하느님은 이러한 인간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인간이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있도록 인간의 모습을 취하시고 이 세상에 오셨다. 우리가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도록 그리고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 그분이 예수님시다.

 

이제 인간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얼마나 큰 은총인가? 얼마나 큰 행복인가? 우리가 갈 수 없기 때문에 하느님이 직접 인간의 모습을 취하시고 우리 가운데 오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1,14)는 사실이야 말로 가장 큰 은총이다. 그런데 인간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 보았는가?

 

요한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1,9-11)라고 적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제 영혼 하느님을 그리나이다. 제 영혼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건만 그 하느님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까"라고 찾기에 애원하기에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에 오셨고 사셨지만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야 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알아본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엄청난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 어떤 은총인가? 요한은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1,12)라고 하였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해서 그분을 하느님으로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 받아들이는 이들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로 구분되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고향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될 것이다.

 

고향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 가를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볼 수 없었던 하느님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없었던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만질 수 없는 하느님을 만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었다. 왜냐하면 요한이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들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라고 말씀하셨던 대로 예수님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하느님을 알려 주신 유일한 분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하느님을 직접 만날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었던 좋은 환경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지만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모두 화가 잔뜩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고향 사람들은 스스로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박차버렸다. 은총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다. 받을 준비가 된 사람만이 받는 것이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 보는 눈이 뜨인 사람만이 받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을 받았다. 성서에 보면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그 예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돈 지방 사렙다의 과부"와 이스라엘의 나병환자 "나아만"장군이다. 이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그뿐만 아니라 요한은 그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요한은 "우리는 생명의 은총을  말씀에 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그 말씀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실제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 보았습니다. 그 생명이 나타났을 때에 우리는 그 생명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증언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있다가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난 것입니다."(요한 1서 1,1-2)라고 선포하였다.

 

즉 요한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직접 보고 듣고 손으로 만져본 사람이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세계를 보았기 때문에 하느님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글로 적어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요한 복음, 요한 1서2서 3서 묵시록 등이 그것들이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보았고 하느님의 세계를 보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준 것이다. 그 덕분에 오늘 우리는 예수님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을 하느님을 알아보고 못 알아보는 것은 육안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을 알아 보는 눈은 육안이 아니라 영안이다. 즉 믿음이 없으면 아무리 보여 주어도 보지 못하고 들려 주어도 듣지 못하는 법이다. 영안이 없을 때 육안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예수님은 분명히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고향 사람들이 말하듯이 예수님은 너무나 많은 것을 직접 보여주셨고 들려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존경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눈이 뜨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육안으로만 보려고 할 때 오히려 영안으로 보는데 장애거리가 된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영적인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영적인 것을 보아도 육안으로 보려고 하는 데에서 영적인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영안이 뜨이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리 보여 주어도 육안으로밖에 보지 못한다. 그 이상의 것을 보지 못한다. 그것이 육안의 한계이고 세계이다. 그러나 영안을 가지면 똑같은 것을 보지만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보지 않고 그 이상의 것을 본다. 즉 육의 세계가 아니라 영의 세계를 본다. 마치 파란 색안경을 썼으면 모든 것이 파랗게 보이고 빨간 색안경을 썼으면 빨갛게 보이듯이 영안이 뜨이면 영안으로 보고 육안으로만 보는 사람은 그 어떤 것을 보아도 육안으로밖에 보지 못하는 법이다.

 

고향 사람들이 영안으로 보지 못하고 영적인 분을 하느님이신 분은 단순히 인간으로, 육적인 분으로만 보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육안으로 보는 사람들이 아니라 영안으로 보는 사람들이다. 똑같은 것을 보면서도 믿음이 없는 사람과는 다르게 보는 사람이다. 육안으로 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것을 보는 사람들이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은 복음을 통해서이다. 복음은 오늘 우리가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복음을 통해서 영안이 뜨이게 되면 복음을 통해 펼쳐보여주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세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오늘 우리 곁을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을 것이고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유광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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