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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참 내가 되는 길 --- 2007.1.28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7-01-28 조회수570 추천수4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7.1.28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
                                                                  

예레1,4-5.17-19 1코린12,31-13,13 루카4,21-30

                                                          

 

 

 

 

 

참 내가 되는 길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함께 끊임없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면서

하느님을 알고 참 나를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운명입니다.

 

신앙인의 삶의 여정도

결국은 하느님을 알아가고 나를 알아가는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없이는 나를 알 수 없고,

나를 모르고는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 탐구 과정과 나의 탐구 과정은 함께 갑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나입니다.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유일무이한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존재인 나입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좋아도 예레미야는 예레미야이고 나는 나입니다.

예레미야는 예레미야 한사람으로 족합니다.

 

바오로는 바오로이고 나는 나입니다.

바오로는 바오로 한사람으로 족합니다.


어떻게 한사람으로서의 참 나를 살아 갈 수 있을까요?

 

내 몸담고 있는 삶의 자리, 공동체를 통해서입니다.

 

아주 현실적이 되어 문제들을 피하지 않고

직면하고 타개해 가면서 내가 되어갑니다.


삶은 전투입니다.

이상적인 유토피아 세상도, 공동체도 없습니다.


단지 유토피아 공동체를 향한

순례여정 중에 있는 문제투성이 공동체들입니다.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였으니 불완전할 수뿐이 없는 공동체들입니다.

 

오늘 예레미야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1독서의 분위기를 보셔요.

전운이 감도는 팽팽한 긴장의 분위기입니다.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고,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사방 적들에게 포위된

고립무원의 예레미야의 처지가 그대로 감지되고 있습니다.

 

불의한 세상과의 전투에서

하느님 친히 예레미야의 백이, 배경이 되어 주시겠다는 선언입니다.


2독서에서 바오로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코린도 교회 역시

파벌과 분열, 시기와 경쟁, 교만, 약자들에 대한 무관심과 무시 등

영적 전투가 치열한 공동체였음이 감지됩니다.

 

사랑이 그렇게도 강조됐다는 것은 역으로 그만큼 사랑이 없었다는 반증입니다.

 

그러니 코린도1서 13장은 사랑의 헌장이기 보다는

자신들이 받은 영적 은사들에 우쭐거리는 신자들에 대한 훈계들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루카복음도 마찬가지 현실입니다.


다음 한 구절에

나자렛 고향에서 배척 받으신 예수님의 참담한 심정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이어 이방인인 시돈 지방 사렙타 과부에 파견된 엘리야와

또 다른 이방인인 나병환자 시리아 사람 나아만을 깨끗하게 해준 엘리사를

예로 들어 고향 사람들의 불신을 은연중 드러내자

화가 잔뜩 난 고향의 회당 사람들,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합니다.

 

다음 묘사가

예레미야와 똑같은 사면초가에 처한 예수님의 현실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 가운데를 가로 질러 떠나 가셨다.”


얼마나 통쾌한 장면인지요.

진정 믿는 자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습니다.

 

사방이 다 닫힌 듯해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열린 문이 있습니다.

 

하느님 친히  백이 되어 주시니

에워싸고 있는 적진을 정면 돌파하여 유유히 떠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이래서 예언자들의 삶이,

예수님은 물론 제자들의 삶이,

진리를 따르는 구도자들의 삶이,

그리도 외롭고 고단하고 고독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성인들 평생 고통의 여정이요 죽어야 휴식이었지만,

이들의 삶은 한없이 밝았고 활력은 넘쳤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을 배경으로 삼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강렬한 사랑과 소명을 체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체험이 이들의 마르지 않는 활력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이제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라.

  모두가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예레미야의 체험, 그대로 내 체험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느님을 백으로 삼아

온갖 어려움들을 돌파하여 참 내가 되어 살 수 있습니다.

 

바오로의 고백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내가 나기 전에 이미 은총으로 나를 택하셔서 불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때 하늘로부터 들려온 말씀의 체험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런 체험 있어야 참 내가 되어

험하고 거친 세상 밝고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뿌리내리고 있기에 지칠 줄 모르는 사랑입니다.

인간의 불의한 현실에 절망하지 않고

매일 매일 새롭게 희망으로 떠오르는 태양 같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바오로가 전하는 사랑, 우리의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할수록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게 됩니다.

얼마나 소중하고 유일무이한 나라는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이런 사랑 절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입니다.

 

오늘 바오로의 사랑의 찬가 중 4-7절의 소 단락을 보면

주어는 ‘사랑’이나 동사는 무려 열다섯 개나 되고 있습니다.

 

사실 13장에서 말하는 사랑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

즉 행동으로 드러나는 사랑입니다.


외롭고 고독하다는 것,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으로 부르시는 신호입니다.

 

빛이 사라지면 어둠이 자연스레 찾아들듯

사랑이 빠지면 절망의 허무주의가 스며드는 것은 필연입니다.

 

마지막 결론과도 같은 바오로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사랑할 때 자유롭습니다.

어디에나 녹아있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햇빛 같은 사랑이요,

공기 같은 사랑이요,

물 같은 사랑입니다.

 

사랑 볕을 쬐면서

사랑을 숨 쉬면서

사랑을 마시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거창한 사랑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마음만 할 수 있으면 가능한 사랑입니다.


요란하고 황홀한 체험들을 통해 유한성과 일시성의 굴레에서 벗어날 때

자유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단조로운 일상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평범한 사랑만이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합니다.

 

매일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해 선사되는 주님의 생명과 사랑이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고 지칠 줄 모르는 사랑을 하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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