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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괴짜수녀일기] 피정편지-베아트릭스 수녀님께 < 26 > ㅣ 이호자 마지아 수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7-01-29 조회수671 추천수6 반대(0) 신고

 

               피정편지-베아트릭스 수녀님께

                         


   사방에서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오래 비워둔 방이라 그런지 여기저기 기어 다니는 벌레, 싱크대 위의 고장 난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아까부터 ‘꼬르륵’ 소리를 내는 배. 그쳤다 내렸다 하는 소나기. 이렇게 혼자 있으니 주위의 모든 게 유난히 크게 들리고 크게 보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소리들을 영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으니 피정의 은총임에는 틀림없나 봐요.


   언젠가 휴가 때 있었던 일들이 생생히 기억나는군요. 벌써 십 년도 훨씬 지났음 직 합니다. 식사 때 수녀님은 들꽃 한 송이라도 꽂아놓으랴, 고운 음악 틀어놓으랴, 깨끗한 식탁 준비하랴 분주한데, 나는 같이 들자는 말 한마디 없이 먼저 식사를 하고 말았지요. 그것뿐이 아니지요. 어느 날은 기도 모임(?)을 하자고 해서 마주 앉아 수녀님이 기도를 먼저 시작하고 있는데, 그 사이 나는 그만 잠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으니….


   그리고 함께 산책을 하는데 뱀이 나오는 바람에 다리야 날 살려라 하고 혼자 언덕 아래로 줄행랑을 친 적도 있었지요. 그뿐인가요. 수녀님의 초상화를 그려준다고 꼼짝 못하게 해놓고는 별 신통한 작품도 못 만들면서 몇 시간을 보내게 했었지요.


   수도자가 놀고먹는 건 안 된다면서 김을 매려고 밭에 나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한 고랑도 다 못 끝내고 슬슬 기어들어오는 나를 보고 얼마나 웃으셨나요? 그리고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몇 시간을 굳은 표정으로 수녀님 옆에 앉아 있었지요. 그 후로 수녀님과는 한 번도 휴가다운 휴가를 같이 보내지 못했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아요.


   이제 며칠 후면 수녀님의 영명일이 다가오는군요. 축하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기에 이렇게 축하편지를 쓰고 있는데, 피정중이라 이 편지를 부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언젠가 며칠간 출타한 후 돌아와 내 기도 책을 펴드는데 그 속에서 이런 상본 하나가 나오더군요. “있는 그대로의 당신은 주어진 선물입니다.” (G 아궤예스)


   매화꽃 사진 아래 조그맣게 씌워진 글귀. 이것을 보는 순간, 나는 말할 수 없는 은혜로움을 느꼈답니다. 하느님을 발견하는 기쁨이었지요. 있는 그대로의 그 모든 것들이 내게 주어진 귀한 선물이라는 사실을.


   열흘간의 피정을 하면서도 얻지 못했던 이런 깨달음을, 오늘 이 글을 보면서 얻었습니다. 이 순간부터 이것은 나의 새로운 좌우명이 되었기에 수녀님과도 이 선물을 나누고 싶군요. 누가 끼워두었는지 모르지만 이것은 분명히 하느님 그분이 해주셨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그래서 이렇게 흐뭇하답니다.


         - 이호자 마지아 수녀(서울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 前 애화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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