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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진정한 사귐을 거절하는 사람들.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1-31 조회수604 추천수10 반대(0) 신고

 

 

<진정한 사귐을 거절하는 사람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마르 6,1-6)



  현대 심리학자들은 인간들이 느끼는 고독이 서로를 이해하려 하기보다 피상적 관계에 머물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말합니다. 허심탄회하게 진심을 나누기보다 피상적이고 친밀함이 결여된 채 기능적인 관계에만 머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가 누구이며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알려하지 않고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습관적인 생활을 반복할 뿐입니다. 필요에 의해서 만나고 있을 뿐입니다.

  가족 간에도 따지고 보면 항상 같이 살기 때문에 잘 안다고 생각되지만 사실 가족끼리도 속마음을 털어 놓는 경우는 드물다고 합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한다고 한다지만, 거의 동물적인 본능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모 자식간, 형제자매간에도 무엇인가 이해해주어야 할 점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채 지내고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육체적 결합 외에 정신적 유대가 필요한데 문제가 있는 경우에는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려 들지 않는답니다.


  이 모든 것이 의례히 알고 있겠거니 하는 안일에서 비롯한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이 군중 속에서 더 고독을 느끼고, 멀쩡히 잘 살아오던 부부가 황혼에 이르러 이혼을 하는 이유가 진실한 사랑을 느껴보지 못했다고 생각해서랍니다.

  사람이 그저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났다고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귐을 통해서 성장하고 형성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만남을 통해서 여태껏 알지 못했던 세계에 눈이 열리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삶에 의미와 희망이 생겨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에 가셔서 새로운 인간관계 맺기를 원하셨습니다. 그저 피상적으로 누구의 아들, 누구의 형제가 아니라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새로운 관계를 알려주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도 마다 않고 행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고향사람들이 껄끄럽게 생각한 것이 바로 예수가 가르치려 들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가 가르치려드는 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특히 자신보다 부족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나서서 옳은 말을 하면 그 내용을 귀담아 듣기보다 그 행위자체를 괘심하게 여깁니다. 그 당시는 땅을 가지고 있어야 사람 구실을 하였습니다. 목수라는 직업은 그저 날품팔이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공부를 제대로 하는 것도 본적이 없었습니다. 예수가 글을 어디서 배웠는지 의아하게 여길 정도였습니다. “저 사람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글(성경)을 잘 알까?” (요한 7,15)

  예수의 손에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도 언짢았습니다. 그것도 안식일에 굳이 율법을 어겨가며 기적을 베푸는 자체가 못마땅했습니다.


  고향사람들은 예수를 그저 피상적인 상태로 바라보았습니다. 편견과 선입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새롭게 변한 모습을 살펴보기보다 옛 모습을 그려내려고만 하였습니다. 자신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모습을 찾으려하였습니다. 예수에게서 메시아의 모습이나 예언자의 모습을 읽어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서로 사랑할 능력과 사랑받을 능력이 있다고 가르치시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는 그들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도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습니다.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8)


  오늘 신부님 강론에서 우리도 한 가지 반성해야 할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께 지극히 인간적인 데만 고착된 편견을 가졌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자 신이신 분으로만 여겨 그분이 인간으로 지내셨던 삶과 고통을 잊고 지내지나 않은지 반성하자고 하십니다.

  예수님도 하느님이셨지만 라자로, 마리아, 마르타와 인간적 우정을 나누셨고, 슬퍼하며 눈물지은 것처럼 우리도 우정을 쌓자고 하십니다.


  진실 된 사귐에는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centering(중심으로 향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release(풀어줌, 해방, 떼어놓음; 쉬게 함)입니다. 거문고가 한 가락을 연주하더라도 그 줄은 따로따로이듯이 우리도 늘 마주쳐다 보는 것이 아니라 공통의 지향점을 향해 나아가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식도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 독립된 인격체로 대접해 주어야 하며, 부부간에도 어느 정도 여유를 주어야 한답니다. 그래서 인격이 성장할 수 있게끔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요한 16,7)


  나이가 들수록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사람은 죽기까지 인격이 성장해야 합니다. 한시라도 한 곳에 머물러 있다 보면 스스로도 힘들어지고 썩기만 합니다. 수양하여야 합니다. 인격도야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학문적 배움일 수도 신앙일 수도 있습니다.

  그 방향을 내면의 중심으로 향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는 사람은 오히려 이기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비우는 것에 궁극적인 가치가 있다고 깨닫게 됩니다. 역설처럼 들리는 이 가르침이 바로 예수께서 그렇게 가르쳐 주시려고 했던 생명으로 나가는 길입니다.



오, 주님.

고독 속을 걸으니

침묵의 소리가

수많은 군중의 함성보다

더욱 크게 들려오나이다.


당신께로 향한 나의 이 외로운 길을

고독에 잠겨 걸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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