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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07) 주님의 " 몽당 연필" (펌)
작성자유정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7-02-02 조회수758 추천수3 반대(0) 신고

출처 : 우리들의 묵상

게시번호 : 11262

게시일자 : 2005년 6월 13일

 

 

          

                     몽당 연필

 

                                     글쓴이 : 이순의

 

<나는 주님의 몽당연필입니다.> 라고 말씀하신 마더데레사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연중 11주일의 강론이 시작 되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없다는 것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소명이며 나아갈 방향임을 제시 하시고 있었다. 마더 데레사는 자신이 주님의 몽당연필이라고 하셨다. 몽당연필은 아껴쓸 마음이 없으면 배척 당하는 것이요, 아쉽지 않으면 구석 어느틈에 버려져 언제 쓰여질지도 모르는 존재이다.

 

그러나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았기에 가장 아쉬울 때라든지 꼭 필요로 할 때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충분조건의 존재가 몽당연필이기도 하다. 이만큼이면 부족함이 없다고 여겨 알뜰하게 쓸모있어지는 존재가 바로 몽당연필이다. 그렇다면 마더데레사는 이 세상의 충분조건에서 충족하고도 남는 존재로 넘치지 않았겠는가?! 꼭 필요한 곳에 반드시 쓸모있도록 쓰여진! 그분은 몽당연필의 품위에 적절한 활동을 욕심없이 겸손되게 잘 하셨음을 누구나 인정하고 우러러 보고있다. 작은 몽당연필이셨던 마더 데레사의 본분은 위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는가?!

 

어제 주일미사에서 신부님의 강론이 아니라도 몇 일 전부터 아들녀석과 실랑이가 벌어졌다. 연필깍기를 기어이 사달라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때도 사지 않았던 기계식 연필깍기를 사 달라는 것이다. 친구들은 모두들 기계로 연필을 깍아오는데 자기만 맨날맨날 엄마가 깍아주어 칼자국이 있는 연필을 써야했다고 이제라도 그 소원풀이를 해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중학교 초반때 까지는 그럭저럭 엄마의 수동식 연필깍기가 먹혀들더니 후반에 가서 샤프연필심을 쓰기 시작하면서 연필깍는 일은 끝이났다.

 

그런데 난데 없이 고교3학년이나 된 녀석이 자동 연필깍기를 사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사주려고 마음 먹었다면 초등학교때 사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사주지 않았다. 늘 핑계를 댈 때는 절약이라고, 엄마의 손이 맨날맨날 놀고 있는데 그깟 기계는 사서 뭘하느냐고 부지런히 부지런히 연필을 깍아주었었다. 또한 자동 기계는 몽당연필은 쓸수가 없다. 너무나 아까운 존재가 되어 버려지는 몽당연필도 불쌍하지만 그걸 아까워하는 마음을 전혀 길러줄 수 없는 문명의 이기가 더 심각하다고 일러주었다.

 

헌 볼펜자루를 이용하여 몽당연필도 쓸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런데 보편적으로 몽당연필 몇 자루 정도는 볼펜대롱에 꽂혀 필통에 담겨있었던 우리시대와 다르게 지금의 아이들은 그런것들을 놀림감으로 삼아버렸나보다. 늘 재활용의 명수였던 엄마로 인하여 내 아들의 곤란함은 이런 엄마의 극성(?)도 감당해야했고, 친구들의 놀림도 감당해야 했었나보다. 엄마가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역할 수 없었고, 그것은 고스란히 학교에서 자신이 감당할 몫으로 남았었다고, 다 자란 고교 3학년에야 아픈 소식을 털어 놓았다.  

 

그때는 말을 하지 않아서 몰랐었다. 그런데 이제야 엄마에게 그 아픈 어린 상처를 들추어 알려주었다. 다행히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서 재활용의 놀림감을 칭찬으로 돌려주시는 사랑을 받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어린 마음은 서글펐고, 서러웠었다고.....! 그때 말하지 그랬느냐고, 그런 줄 알았다면 엄마가  기어이 사 주었을텐데....? 너에게 상처가 되게 하려고 그러지는 않았다고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이미 그때도 지금도 그런 엄마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다고 위로해 주었다.

 

지금은 연필을 깍기 위해서 연필깍기를 사 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엄마가 깍아주시는 몽당연필이 다시 갖고 싶어서 연필깍기를 사 달라고 해 본 소리란다. 제법 잘도 깍아 쓰더니 새삼 엄마가 깍아주는 몽당연필을 지니고 싶었나보다. 나는 아들이 어렸을적에 학교에서 돌아온 연필을 꺼내 보면서 아들의 하루를 짐작하곤 했었다. 그렇게 작은 필통속에 아들의 우주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짐작되어지는 질문을 하고,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깍아서 새 연필을 채워주면서 하루의 생활이 무사하기를 빌었다.

 

그런데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몽당연필 깍기를 다시 시작하라는 것이었다. 버린 기억이 없는 몽당 연필들을 찾아 보았다. 역시 몽당연필은 몽당연필이었다. 아까워 버려지지 않고 헌 필통에 담겨 고스란히 그대로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나만 반가운 줄 알았더니 아들녀석은 더 반가워한다. 볼펜대롱을 반토막 내어 꽂혀진 모습들이 반가웠고, 너무나 쪼꼼 남은 연필도 연필이라고 그만 귀여움을 어쩌지 못하는 것이었다. <엄마가 얼마나 지독한지 이렇게 작은 연필을 보면 알겠지? 친구들이 놀리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했을거야!>

 

그리고 우리는 마주앉아 몽당연필을 깍기 시작했다. 아들은 신이 났고, 유년의 빈곤감이 그렇게라도 치유되고 있다는 것을 어미는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의 아들은 다시 그 유년의 사랑을 되돌려 받고 싶은 눈치다. 그토록 무거운 현실로 감당했던 지겨운 몽당연필이 이제야 그리움이 되어 다 자라버린 아들의 필통에 담겨지고 있다. 내가 자동연필깍기를 지금까지 사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잘했는지 못했는지는 판단할 수가 없다.

 

그러나 어린 아들이 엄마의 사랑을 부인하지 않았으므로 그런 아픔들을 이겨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짐작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덩치 큰 청년의 모습이 되어 유년의 견딤이었을 엄마의 그런 사랑을 다시 그리워 한다는 사실에는 고마움과 감동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생활도 곤곤하였는데 연필마저 기계로 깍아주었더라면 아들의 마음조차 곤곤하였지 않았겠는가?! 엄마의 수동식 연필깍기가 하루도 빼지 않고 작동을 하였으므로 사랑자리는 풍성히 넘쳐 친구들이 뭐라고 하든 잘 참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다시 매일매일 몽당연필을 깍을 것이다. 대롱도 수리해서 다시 끼워주고, 여러해 동안 돌아보지 않았어도 그 자리에서 묵묵히 기다려준 몽당연필들에게도 풍부한 일거리를 안겨줄 것이다. 그러고보니 몽당연필로 인하여 우리 모자 간에는 서로 말하지 않아도 참고 견디며 인내하였던 사랑의 순간들이 부족하지 않았던 것 같다. 돌아보면 안타까운 마음으로, 미안한 마음으로, 안스러운 마음으로, 잠자는 아들 곁에서 눈시울을 적시며 연필을 깍았던 밤들도 무수히 많았었다. 그런데 그것들이 아들의 가슴이라는 예쁜 그릇에 사랑이라는 고운 꽃으로 피어있었다니!

 

몽당연필은 볼품이 없었어도 우리 모자에게는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준 사랑의 근원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만큼의 업적은 아닐지라도 몽당연필은 우리 가정에 작지만 소중한 기록을 장식하고 있다. 이제야 마더데레사께서 몽당연필을 상징으로 삼으신 뜻을 얕으나마 은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신부님께서는 마더데레사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몽당연필이 되어야 한다고 강론을 장식하셨다. 그 겸손의 모습이 곧 성스러움이 아니겠는가?!

 

일상안에 살고있는 우리는 자동식 연필깍기에게 소외당한 몽당연필들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ㅡ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마라.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 내어 주어라. 마태오5,39-40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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