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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제32회. 한국 최초의 방인 주교. ~♠†/ 오기선[요셉]신부님 이야기 /원작 차 엘리사벳.......
작성자양춘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7-02-04 조회수598 추천수8 반대(0) 신고

 

†♠~ 제32회. 한국 최초의 방인 주교. ~♠†/ 오기선[요셉]신부님 이야기 /원작 차 엘리사벳.......


본 제국은 1941년 12월 8일 선전포고를 내리고 국내의 종교 단체에도

이리 떼 같이 덤벼들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일본 기독교 단체 법’이란 책을 만들어서 천주교회에 까지 들어와 횡포를 부렸습니다.

천주교회도 일본적인천주교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천황이 더 높으냐? 그리스도가 더 높으냐?’

하고 따지며 때로는,

‘제대위에 가미다나[일본인이 섬기는 신]를 모셔라,

미사 전에 일본 국가를 불러라,   

신사 참배를 하여라.’ 하며 떼를 썼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해성사를 줄 때 신자들이 신부에게 스파이 짓 한 것을 고백할지도 모르니 우리가 고백소에서 내용을 들어야겠소.’ 하면서 고백소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아 버티기까지 하였습니다.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선전포고가 있은 후 지방 교회의 실정은 살얼음 걷는 형편이었습니다.

유재옥 신부, 김영호 신부가 투옥 되었다느니, 각 지방에서 방인 신부나 외국인 신부들이 꼼짝 달싹 못 하도록 금족령이 내렸다느니 하며 서울 명동 주교좌성당에는 매일 불안한 소식만 들어왔습니다.

중부 경찰서 고등계, 헌병대, 도 경찰부, 총독의 경무국 등에서는 서울 교구 사무실을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매일 와서 교구장을 괴롭혔습니다.

‘일본 제국 내에 있는 천주교 각 교구의 주교들이 왜 외국인으로 있느냐?

 왜 우리 일본신부 에게 자리를 내 주지 않느냐?’

고 하며 교구장[아드리아노 라리보]에게 사퇴 요구를 하였습니다.

요셉 신부는 외국인 주교의 비서로서 요주의 인물로 경찰국 블랙리스트에까지 올라 있었습니다.

“오 신부, 아무래도 오 신부가 동경을 다녀와야겠네.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 방인 주교가 나도록 말이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국인이 동경에 가려면 꼭 경찰부에 보고를 해야 했습니다.

오 요셉 신부는 ‘일본기독교단체법’이라는 책을 구입하여 붉은 줄, 검은 줄을 수없이 친 후 중부 경찰서 고등계로 가서 담당 형사를 만났습니다.

“이 법안을 여기서는 다 알 수가 없어 동경의 도이다쓰오 대주교님께 연구차 다녀와야겠습니다.”

“아하~, 오 신부도 이제 황국신민이 다 되었군요.

 좋스므니다. 적극적으로 도와 드리겠스므니다.”

요셉 신부가‘일본기독교단체법’을 연구하러 동경으로 간다고 하니 모든 기관에서는 쌍수로 환영하며 모든 서류, 도선권 등을 준비해주었습니다.


부산역[1941년 12월 20일]에 도착하니 벌써 고등계 형사가 대기하고 있다가 요셉 신부의 짐을 손수 받아 들고 공고마루[배의 이름]2등 객실로 안내해주었습니다.

형사는 2등 객실에 가보더니,

“아니, 이런 귀한 손님을 2등실 에다 모시다니!”

하면서 1등 객실로 안내했습니다.

“요금은 더 지불하지 않아도 되니 그냥 편히 다녀오십시오.”

요셉 신부는 거친 현해탄을 건너 12월 21일 아침에 시모노세키 항에 도착했습니다.

“오 신부님 안녕하십니까? 오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난데없이 형사 두 명이 나타나서 인사를 했습니다.

일본인들끼리는 벌써 연락이 다 된 모양이었습니다.

그들은 특급열차 2등 좌석으로 요셉 신부를 안내했습니다.

기차가 동경역에 도착하자 벌써 그곳에서도 형사 두 명이 대기하고 있다가 요셉 신부를 맞이했습니다.

‘참으로 호강스러운 여행이구먼.!”

요셉 신부는 혼자 속으로 생각하며 그들을 따라 갔습니다.

그들은 손수 택시를 잡아 요금까지 주며 운전사에게 ‘도이다쓰오’ 대주교가 계신 주교관으로 안내하라고 신신당부하고 나서 헤어졌습니다.

주교관에 도착하자,

‘도이다쓰오’ 대주교는 요셉 신부를 반가이 맞아주었습니다.

“대주교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일본기독단체법’을 강습 차 일본의 도이다쓰오 대주교님께 온다고 행정 사법 당국에 보고하였으나. 사실은 한국 교회의 실정을 전달하려고 원 주교님의 밀사로 왔으니 바오로 마렐라 교황 사절에게 연락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면회를 신청해 놓을 테니 그동안 신학생 기숙사에서 기다리십시오.”

기숙사에서 나흘이 지난 25일 오후 3시에 ‘도이다쓰오’ 대주교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교황 사절에게 연락이 되었으니 교황 사절관 으로 가 보십시오.”

전화 연락을 받은 요셉 신부는 설레 이는 마음으로 교황 사절관을 찾아갔습니다.

“바오로 마렐라 교황 사절께서는 와병중이시니 비서인 저에게 말씀해 주시면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하고 비서 신부가 말했습니다.

“참 곤란합니다.

 말씀을 전해서 될 일이 아니고 지금 한국 교회의 실정이 딱하게 되어 직접   면회하기 전에는 말씀드릴 수 없으니 실례이지만 직접 면회하는 영광을 주   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비서 신부는 망설이며 몇 번인가 입맛을 다시더니. 그럼 응접실에서 기다려 보라고 하였습니다.

잠시 후,

비서 신부가 요셉 신부를 교황 사절 침실로 안내하였습니다.

병석에 누워있던 교황 사절은 잠옷 바람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습니다.

요셉 신부는 ‘대동아 전쟁 선전포고[12월 28일]’ 가 내린 후 한국 각지에서 일어난 교회의 모든 일과 교구의 실정을 현미경 보듯이 상세하게 보고하였습니다.

교황 사절은 요셉신부의 말을 듣고 흥분하였습니다.

“당국에서 자꾸만 교구장 원 주교님께 교구장직을 사퇴하라고 협박하여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교구장직을 사퇴하겠다는 뜻을 전하는 바입니다.”

“그럼 일본인 주교를 보내야지!”

하고 교황 사절이 말하였습니다.

요셉 신부는 갑자기 하늘과 땅이 무너지는 것 같은 심정이 되었습니다.

요셉 신부는 주보인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께 마음속으로 도움을 청하며 다시 용기를 내어 교황 사절께 탄원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제 나라 말을 하며 민족끼리 행복하게 사는 것을 원 하   실 것입니다.

 가톨릭도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히면 그 나라 백성으로 하여금 스스로 다스   리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한국의 역사를 보면 사천년 동안 끊임없이 외국의 침략을 당하여 천추만대   골육[긴 세월 동안 뼛속까지]에 사무쳐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중심부인 서울 교구에 일본인 주교를 보내셔서 성직 계급   과 신자 20만 명이 순명치 않고 불복종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를 위하여 20만의 신자와 60명의 방인 신부를 다 파면하시겠습니까?    교황 비오 2세 성하의 의향은 그것이 아닐 것입니다.

 한국의 모든 성직자와 신자들은 일본의 주교를 원하지 않는다는 애절한 탄   원이오니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십시오.

 일본의 주교를 보내는 것이나 한국인 주교를 보내는 것이나 다 각하의 말   씀에 달려 있으니 이 난국의 수습을 잘해주십시오.”

요셉 신부는 신학생 시절 이불 속에서 몰래 배운 불어 실력으로 마렐라 주  교님께 온 힘을 다하여 역설했습니다.

교황 사절은 웃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한국인 신부를 내겠으니 안심하십시오.”

요셉 신부는 교황사절의 말을 듣는 순간 등에서 땀이 흐르고 커다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감사 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각하께 말로 사연을 전하였으나 지금   원 주교님의 공식 편지가 항공으로 오는 중입니다.

 편지를 몸에 지니고 오려고 하였으나 시국이 그렇지 못하여 사람 따로 편   지 따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원 주교님 편지도 받고 오 신부님의 말도 들어 일이 잘되도록 하겠   으니 마음 놓고 돌아가시오.”

“원 주교님의 공한 사임서를 입수하신 후, 여부를 확인하고야

 돌아가겠습니다.

 공한을 받으시는 대로 도이다쓰오 대주교님을 통하여 알려주십시오.

 ‘일본기독단체법’을 도이다쓰오 대주교님께 연구차 온다고 하여 서울을 떠   났으니 시종이 여일[처음과 끝이 같음] 하여야 되겠기로 도이쓰오 대주교   님께 알려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겠으니 염려 말고 돌아가십시오.”

“그러면 한국 민족의 희망을 인지하신 각하께 맡겨드리고 마음 놓고 돌아가   겠습니다.”

교황 사절관을 나온 이튿날 오전 9시경에 도이다쓰오 대주교를 통하여 교황 사절이 ‘원 주교님 공한[사임서]을 잘 받았으니 안심하고 돌아가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요셉 신부가 특급열차로 시모노세키에 돌아오자 먼저 올 때 만났던 형사들이 나와 있었습니다.

“‘일본기독교단체법’을 잘 연구 하였스므니까?”

“예, 덕분에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

요셉 신부가 서울에 돌아온 후 열흘쯤[1942년 1월 3일] 지나자 동경에서 서울 교구장[아드리아노 주교]과 노기남 신부[바오로]에게 교황 사절의 전문 두 통이 왔습니다.

“서울 교구 새 교구장으로 노기남 바오로 신부를 임명한다.” 는 비오 12세 교황의 전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노기남 바오로 신부에게 온 공문에는 서울 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는 요지와 아울러 당분간 평양 교구와 춘천교구 교구장으로 관할권을 준다는 요지의 공한이었습니다.

명동 주교좌성당에서는,

교구의 주도권이 교체되는 새 교구장 착좌식[1942년 1월 18일]과 원 주교님의 퇴임식이 거행되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방인 주교인 새 교구장의 임명장을 낭독하는 요셉 신부의 눈에서 또 다시 감격의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제 33회. 종의 수난으로 이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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