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용서와 아량.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2-06 조회수772 추천수3 반대(0) 신고

 

 

<남의 죄를 지적하기보다 용서와 아량을 보여야한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마르 7,1-13)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께 몹쓸 죄를 지어 이민족의 침략과 바빌론 유배와 같은 곤란을 당했다고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죄를 세 가지로 요약하였습니다. 첫째로 자신들이 하느님과의 계약을 충실히 지키지 못한 부정(不貞), 둘째로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지 못한 부정(不正), 셋째로 하느님의 거룩함을 더럽힌 부정(不淨)이 그것입니다. 이런 반성으로 바빌론 유배 이후에 출현한 유다이즘에서는 이러한 부정의 죄를 없애기 위해 모세오경을 율법을 준수하려고 많은 규정을 두게 되었습니다.

“너희는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레위 20,7)


  BC 2세기경에는 바리사이들이 나타나 평신도로서 사제에게 요청되는 정결예식을 스스로 지키려는 운동이 생겨났습니다. 손 씻는 예식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더욱 정결을 지키기 위하여 무심코 저지를 수도 있는 것까지 상정하여 지켰습니다. 랍비 아카바는 그것을 율법으로 예방한다는 의미로 ‘율법의 울타리’라고 부르며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농사짓는 농부가 안식일에 규정을 어기고 씨를 뿌렸을 경우, 농부와 상인이 십일조를 바치지 않았을 경우, 생산 및 유통과정에서 범했을 모든 부정을 정결하게 하기위하여 십일조를 먼저 떼어 냈고 반드시 씻어야 했습니다.


  예수 당시 일반 유대인들은 이와 같은 규정들을 알면서도 잘 지키지 못했습니다. 생활여건이 도저히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일반백성들 마음엔 항상 그 율법규정을 지키지 못한다는 죄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 규정들은 점차 바리사이로 하여금 우월한 감정을 지니게 했고, 일반백성들에겐 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눈감고 아웅 한다.’는 속담이 생겨나듯이 규정이 오히려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변형되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코르반(korbanas, 성전재산, 봉헌물) 선언 규정입니다. 인간들은 모든 사회적 제도를 언제나 제 이익을 위해 빈틈을 노리기 마련입니다. 한 번 코르반하고 선언하면 누구도 건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채권자가 변동이 생기면 취소하고 원상으로 만들면 되었습니다.


  인간의 법이 하느님의 법과 동등할 수 없는데도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법을 지킨답시고 인간의 법을 만든 다음 점차 두 법을 동등시하고 결국에는 인간의 법으로 하느님의 법을 대체하면서 무력화 시킨 셈입니다.


 위선자를 뜻하는 그리스어 hypokrites 는 연극배우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배우들은 자기 개인의 심정을 얼굴에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오로지 주어진 역에 충실하여야 좋은 배우입니다. 배우는 아무리 부모가 죽거나, 자신이 병들어 아픈 상태라도 일단 무대에 서면 가면을 쓴 듯이 연기해야합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배우처럼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자세가 편하고 이득을 주며 남들에게서 존경을 받는 길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 중에는 어려서 착한아이가 되라는 심리적 강요를 받아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들은 정직하고 공정하며 타인을 격려하라고 사는 목표를 세운답니다. 교사가 되거나 종교인이 되어 사회 정의를 요구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남보다 높은 윤리적 요구를 하며 칭찬에 인색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제대로 인격이 성숙하지 못하면 사회에다 분노를 일으키며, 자신에게는 속으로 호박씨 까는 부도덕한 모습을 보인다고 합니다. 이중적 잣대를 들이 댑니다. 위선자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닦아야할 인격수양은 자연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완벽한 것을 추구하는 성격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부족한 인간에게 눈을 돌리면 언제나 결핍과 분노가 일어날 뿐이랍니다. 그러니 부족한 인간인 자신과 타인들을 너그러이 받아들이고 용서하되 자연과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즐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바리사이들은 남의 죄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분노하고 가르치려 들었습니다. 제 눈의 들보는 못보고 남의 티만을 지적하였습니다.(마태 7,5) 우리도 이런 어리석은 행동에서 벗어나기 위하여서 완벽한 것은 자연과 하느님을 바라봄으로서 해결하고 부족한 인간들에게는 아량과 용서를 베푸는 마음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