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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딸아이의 성년에 내 성년 시절을 돌아보니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07-02-06 조회수642 추천수4 반대(0) 신고

 

                     딸아이의 성년에 내 성년 시절을 돌아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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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대학 2학년이 되는 딸아이는 1987년 생이다. 만 나이로는 이제 스무 살이다. 우리 국민성이 대체로 성급한 탓인지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나이부터 한 살을 먹고 보니 '보통 나이/우리 나이/한국 나이'라는 이상한 관습이 아직도 엄존하기는 하지만, 모든 서류 상에 딸아이가 올해 스무 살인 것은 분명하다.

1987년 생의 2007년, 만 스무 살, 성년(成年)이다. 쉽게 말해 '어른 나이'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희승 국어사전은 성년이라는 명사 풀이를 이렇게 하고 있다. '신체나 지능이 완전히 발달되어 완전한 행위 능력이 있다고 간주되는 나이. 만 20세 이상'.

사전에는 '성년식(成年式)'이라는 명사도 있다. 성년식의 풀이를 보면 성년의 의미와 중요성을 되새겨 볼 수 있다.

'①왕이나 왕족이 성년에 달한 때 하는 의식. ②성년의 날인 4월 20일에, 그 해에 성년이 되는 젊은이들을 위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또는 기업들이 베푸는 축전. ③미개인 사이에서 청년 남녀에게 씨족이나 종교 단체 등의 일원으로 가입하는 자격을 주기 위해 행하는 공공적 의식'.


▲ 지난해 12월 24일 밤, '성탄성야 장엄미사'를 지내고 나서 모녀가 성당 제대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딸아이가 엄마보다는 키도 크고 좀더 예쁘지 싶다. 엄마처럼 지나치게 풍만한 몸매는 갖지 않았으면 싶고...  
ⓒ 지요하

실은 지난해부터 딸아이의 성년 나이를 의식하며 살았다. 부모로서 자식의 성년에 관심은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국 나이로 성년에 이르렀던 지난해의 생일(11월 17일)은 금요일이었고, 내가 일본 동경에서 돌아오던 날이었다.

나는 저녁 무렵 인천공항에 내리자마자 휴대폰 전원부터 켜고 대학교 기숙사에 있는 딸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성년의 생일을 축하했다. 내가 집에 있었더라면 서울로 올라가서 기숙사에 있는 녀석을 불러내어 저녁식사 자리를 마련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아쉬움을 삼켰다. 그리고 그때 '내년 만 나이 성년 생일에는 각별히 신경을 써줘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 올해 11월 17일은 토요일이다. 녀석이 올해도 기숙사 생활을 할 경우 기숙사를 나와 집에 올 수 있는 날이다. 녀석의 올해 성년 생일에는 가족 모두 모여 저녁 식사라도 할 생각이다.

지난해 11월 20일 내 '가족 메일'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내가 일본에서 귀국하던 지난 17일은 우리 규애의 20회 생일이었네. 인천공항에 내리자마자 휴대폰의 전원을 켜고 우선 딸에게 축하 전화부터 했네. 아빠가 집에 있었으면 축하 선물이라도 보냈을 텐데…. 20회라는 숫자가 각별한 감회를 주는 것 같네. 아이를 낳고 나서 너무도 신기해서 강보에 싸인 아이를 보고 또 보고 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년이 흘러 아이가 성년이 되었다니…. 이상하게 비장한 마음이 드는 것도 같네.

어제 한결이에게 전화를 걸어 지난 17일 누나 생일에 축하 전화를 했느냐고 물었더니 휴대폰으로 문자를 날렸다고 하더군. 녀석이 누나 생일을 잊지 않고 휴대폰 문자라도 날린 것을 기쁘고 다행스럽게 생각하네."

부모 자식간의 나이 차가 너무 나긴 하지만, 어느덧 성년에 이른 자식을 두었다는 것은 가까운 거리에 어엿한 대화 상대, 더 나아가 인생의 길동무를 두게 되었음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생각하면 참 흐뭇한 일이다.

<2>

겨울방학 덕에 딸아이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다. 노모께서 열흘여 전에 아파트 현관 로비에서 낙상을 하신 바람에 딸아이는 요즘 주로 집에서 생활한다. 요즘 들어 살림을 도맡게 된 엄마를 열심히 도왔는데, 엄마가 개학으로 출근을 하게 된 어제부터는 딸아이가 더욱 집을 지켜야 했다.

대학생 딸아이와 얘기를 나누다보면 요즘 대학의 풍경과 속내가 쉽게 감지된다. 초장부터 취업의 중압감 속에서 공부를 하는 대학생들, 사회적 고민을 기피하고 진보적 가치관보다는 보수적 가치관을 선호하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역으로 외롭게 고민을 하게 된다는 말도 딸아이에게서 듣는다.

지난 4일에는 딸아이와 함께 논산을 갖다 왔다. 지난달 21일 집에 왔던 아들녀석이 또 한차례의 '토막 방학'이 끝나 학교 기숙사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녀석을 데려다주는 일에 딸아이가 동행을 해주었다.


▲ 지난해 5월, 아들 녀석이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 찍은 사진이다. 가운데가 내 아들 녀석이다.  
ⓒ 지요하

태안에서 논산까지는 2시간이 넘는다. 왕복 4시간 30분 정도 운전대를 잡아야 한다. 아들녀석을 내려주고 혼자 돌아올 때는 더욱 힘이 들고 외롭기도 하다. 그것을 생각하고 딸아이는 자신이 집에 있을 때 아빠가 논산을 가게 되면 기꺼이 동행을 해주곤 한다.

나는 그런 딸아이가 고맙다. 딸아이가 동행을 해주면 우선 심심하지 않다. 이런저런 많은 얘기들을 나누게 되니, 그것 자체로서 어떤 생산성을 확보하는 듯한 느낌을 얻기도 한다. 그리고 재미있게 얘기를 하다보면 먼길이 단축된 것 같은 느낌도 갖게 된다.

지난 4일에는 야간 운전을 했다. 아들녀석을 논산에 데려다줄 때는 주로 야간 운전을 선택한다. 아들녀석이 학교 기숙사에 9시까지 들어가면 되니, 집에서 저녁을 먹고 출발해도 늦지 않는다. 야간 운전은 이동카메라에 대한 부담도 없고, 길이 한산해서 더욱 좋다. 낮 운전보다 자연적으로 더 긴장을 하게 되어 졸음 현상도 겪지 않는다.

6시 30분쯤 출발했다가 11시쯤 집에 돌아왔다. 장시간을 함께 논산을 가고 오면서, 이번에는 아빠의 성년 시절 이야기도 딸아이에게 들려주었다. "네 성년 시절에 아빠의 성년 시절이 궁금하지 않니?" 하니, "그다지 궁금하지는 않지만, 아빠의 성년 시절을 얘기해주시면 잘 들을 게요" 해서 하게 된 얘기였다.

  <3>

1948년 생의 성년은 1967년과 1968년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지금의 딸아이처럼 대학생이 아니었다. 대학은 내게 먼 세계였고, 내게는 가난하고 우울한 현실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암울한 기분으로 '실업자' 생활을 시작한 나는 1967년 3월 1일 삼일절 기념 방송의 만세소리에 충동을 받아 장편소설 집필에 착수한다.

40일 동안의 악전고투 끝에 4월 10일 1080매의 장편소설을 탈고한다. 그리고 누님의 격려에 힘입어 당시 유일한 문예지였던 <현대문학>의 제1회 장편소설 현상공모에 응모한다. 결과는 낙선.

하지만 최종심에서도 한 단계 위인 '당선 후보'에까지 올랐다가 낙선한 사실로 말미암아 '나도 작가가 될 수 있다'는 꿈을 갖게 된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무려 15년의 대장정을 하게 되고….


▲ 1968년 봄에 안흥항에서 찍은 사진이지 싶다. 지금은 본국 콜롬비아에 가 계시는 태안천주교회 초대 주임 고대연 야고버 신부님이 지난해 보내주신 CD 속에 들어 있었다. 40년 전의 내 모습이 신기한 느낌마저 갖게 한다. 내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여성은 내 누님이다.  
ⓒ 지요하

1967년 6월에 내 두 눈으로 목격한 '6·8 선거'의 타락상은 내게 큰 슬픔과 분노를 안겨주었고, '현실인식'의 기틀로 자리하게 된다. 나는 당시에 '6·8 선거'라는 시를 지었는데, 지금도 그 시를 읽어보면 내가 국가적 현실문제에 얼마나 민감했는가를 잘 느낄 수 있다.

순박한 청년의 눈에 비친 제7대 국회의원 총선거의 풍경은 한 마디로 참혹했다. 관권이 노골적으로 개입하고 금권이 공공연히 춤을 춘 선거였다. 그 부정선거·타락선거의 풍경들 속에서 나는 당시 여당이었던 공화당을 증오했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을 떠받쳐 주는 미국도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런 인식들이 그 시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그 해 가을 고장(충남 태안)의 최초 문학단체인 <여울문학동우회>의 창립에 참여하고, 간사를 맡아 동분서주한다. 그리고 다음해인 1968년 겨울 고장의 최초 문학지 <여울>을 발간하고, 내 소설이 처음 활자화되는 기쁨을 맛본다.

소설 아닌 시문이 활자화된 기쁨은 이미 고교생 시절에 세 번이나 맛보았다. 시조 작품들이 중앙일보의 '중앙시조'에 세 번이나 뽑혀 활자화되면서 500원씩의 상금도 받았던 것이다(지금은 1천 원인 대폿집의 막걸리 한 잔 값이 당시엔 5원이었다).

소설 작품이 최초로 활자화된 책을 대하는 기쁨은 참으로 컸다. 오·탈자도 많고, 조악한 형태로 만들어진 책 꼴에 그 기쁨이 금세 실망으로 변했지만….

1968년 봄에는 태안읍사무소의 '인구센서스' 조사 요원으로 채용되어 두 달 동안 작업을 했다. 그리고 품삯을 받았다. 얼마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고교생 시절의 '중앙시조' 500원 고료들을 제외하고는 내가 처음으로 일을 해서 벌어본 돈이었다.

그 일이 끝난 후에는 고장의 '00서민금고'에 취직해서 수금 사원으로 일했다. 고리대금업의 하수인인 셈이었다. 못할 일이었다. 매일같이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돈을 받아오는데, 받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고, 때로는 싸움도 해야 했고, 통사정을 하는 할머니의 피눈물도 보아야 했다.

석 달인가, 넉 달인가 그 일을 하다가 그만두었는데, 그 일을 한 짧은 동안에 세상살이가 참으로 간단치 않다는 것을 절절하게 체감한 듯싶었다. 그 후로는 곡물 취급 장사를 하시는 아버지의 일을 돕는 한편 태안 성당의 '가톨릭농촌청년회(가톨릭농민회 전신)'에 참여하여 춘곡(보리) 수확 때는 원동기와 탈곡기를 차에 싣고 농촌 마을들을 다니며 열심히 봉사 활동을 하기도 했다.


▲ 1966년 고3 시절, 나를 따르던 김병업이라는 1학년 후배가 그려준 그림이다. 40년이 흐른 오늘에도 잘 간직하고 있는데, 김병업이라는 후배는 소식도 모르고 있다.  
ⓒ 지요하

이것이 딸아이의 성년에 돌아본 내 성년 시절의 이력이다. 가난의 굴레와 변방의 쓸쓸함 같은 것이 느껴지긴 하지만, 그런 대로 다채로움도 있지 싶고, 딸아이에게 들려주는 일에 부끄러움은 없지 싶었다.

딸아이는 아빠의 성년 시절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었다. 다채로운(?) 이력에 관심을 보였고, '6·8 선거'를 비롯한 어떤 사항들에 대해서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

오늘의 내 모습이 딸아이에게 별로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많이 부끄럽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이룬 것 없고 가진 것도 없지만, 가치관 쪽으로 점점 시야가 확대되어 가는 자식들과 언제라도 대화를 할 수 있는 '마음 바탕'을 확보하고 있다는 생각도 한다.

아들녀석 때문에 또 한번 야간 운전으로 장시간 논산을 가고 오며, 성년의 딸아이에게 아빠의 성년 시절 이야기를 들려준 것은 결국 내가 지니고 있는 '마음 바탕'을 다시 한번 스스로 확인해보는 것이기도 할 터였다. 의미 있는 일임을 확신하며….  


  2007-02-06 14:32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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