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311) 별 헤는 밤 / 전 원 신부님
작성자유정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7-02-07 조회수653 추천수12 반대(0) 신고

 

                 별 헤는 밤

 

                                글쓴이 : 전 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말씀지기 주간)

 

 

지난 성탄절에는 유난히도 눈이 내리는 시골의 작은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본당을 떠나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어 성탄 때마다 사제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미사를 드리곤 했지만, 이번만은 서울을 꼭 벗어나리라고 일찍부터 결심을 해 둔 터였습니다.

 

서울의 콘크리트 숲을 벗어나 산과 들판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후련하고 금방 행복해집니다.

충청북도 진천에서 한참을 들어가는 산간 마을에 자리 잡은 피정집에서 그곳을 지키는 몇 분의 수녀님들과 작은 경당에서 옹기종기 둘러앉아 성탄 밤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밤 풍경을 맞아들이기 위해 성당의 커튼을 모두 열어젖히고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성가를 부르며 소박하게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경축하였습니다.

눈이라도 펑펑 내려줄 것을 기대했지만, 그날따라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 유난히 밝은 별들만이 온 하늘에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습니다.

 

눈이 내리지 않아도 한적한 산골의 밤은 고요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알퐁소 도데의 단편 소설 [별]에 나오는 양치기 목동처럼 감미롭고 아름다운 밤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한겨울 밤하늘의 찬 기운이 별빛에 흐르고 있었습니다.

 

양치기 목동 옆에서 주인집 아가씨 스테파네트가 새근새근 자고 있는듯,

늦은 밤 하루 일과에 지쳐 깊은 잠에 빠진 수녀님들의 숨소리가 고요한 밤공기를 타고 들리는 듯했습니다.

 

 

별은 수많은 이야기와 그리운 기억들을 품고 있는 듯합니다.

별을 바라보면 '어린 왕자' 의 이야기가 들려오는 듯하고, 윤동주의 맑은 시가 저절로 읊조려집니다.

밤을 지새우며 양떼를 지키는 목동들의 평화로운 모습이 그려지기도 하고,

툇마루에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드러누워 별을 세며 스르르 잠이 들던 유년 시절의 그리운 기억들이 피어나기도 합니다.

 

강원도 최전방의 전선을 지켜야 했던 초병 시절, 밤새 별을 바라보며 잊고 있었던  성소(聖召)의 꿈이 되살아나 그 다음날 수도원을 지원하는 긴 편지를 썼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억만 광년의 어둠을 뚫고 오늘 이렇게 빛을 발하는 별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무한하심과 영원성을 보게 됩니다.

인생의 밤이 시름처럼 한층 더 어둡고 깊어질 때 별빛을 바라보며 영원한 진리를 동경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 속의 동방박사들은 세상의 어둠 속에서 별을 통하여 진리이신 구세주의 탄생을 감지했습니다.

밤하늘의 별은 이렇게 내 인생의 기억의 창고를 헤집어 순결하고 진실했던 삶의 순간을 끄집어내어 내 존재를 소중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적막한 산 속에서 홀로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며 느끼는 외로움은 황홀한 고독입니다.

우주의 중심에 서 있는 듯 존재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느끼기도 하고,

우주 안에 흩어져 한낱 보이지 않는 티끌이 되기도 합니다.

 

번잡한 도시에서 느끼는 군중 속의 외로움은 '고독' 이라기보다 '소외' 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경쟁하며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 내 존재를 드러내려고 몸부림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시의 생활이란 결국은 홀로 남아 있는 소외된 이방인의 삶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이 사람들을 떠나 이렇게 광야를 찾아 나서는 것도 더 깊은 밤의 고독을 만나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머물던 피정의 집에서 20분 정도 더 산속으로 들어가면 '발래기' 라는 지명을 가진 산골 마을이 나옵니다. 그곳에 '한국순교복자수녀회' 분원인 관상 공동체 '대월의 집' 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제가 그곳을 방문한 날, 아직 못다 한 콩 타작을 위해 앞마당에서 도리깨질을 하던 수녀님이 반갑게 저를 맞이해 주셨습니다.

꽤 나이가 드신 수녀님에서부터 어린 수녀님까지 열두 분의 수녀님들이 산속에서 일생동안 기도하고 일하며 살겠노라고 서원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세상 소식이라고는 그저 간간히 듣는 라디오 뉴스와 매주 배달되는 교회 신문이 전부였습니다.

세상을 온통 흔들어 놓았던 9.11 테러 사태도, 북한 핵 실험 소식도 한참을 지나서야 들을 수 있을 만큼 세상과는 철저하게 떨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가끔씩 방문하는 손님들이 '세상소식' 의 전령사가 되어 세상일을 전해 준다고 했습니다.

 

관상 공동체 수녀님들은 사람을 떠나 보이지 않는 장소에서 하늘과 땅을 벗 삼으며 풀꽃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더 얻고 더 누리기 위해 발버둥 칠 때,

그분들은 아무도 보아 주지 않는 첩첩산중에서 하루하루 일용할 양식을 마련하기 위해 농사일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문득 생 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의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사막 어딘가에 우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야."

 

 

교회를 참으로 아름답게 하는 것은 화려하고 멋지게 세워진 성당들도 아니고,

수천 명이 몰려드는 거대한 성당에서 웅장한 성가를 울리며 거행되는 장엄한 전례도 아닙니다.

 

아무리 산이 높고 기암절벽이 솟아 있다 해도 산등성이 곳곳에 작은 풀꽃들이 소리 없이 피어 있어 산에 온통 생기를 불어 넣듯이,

교회 구석구석에서 소리 없이 기도하고 봉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스스로 가난을 살며 삶의 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교회에 생명을 줍니다.

 

그들은 말하지 않아도 교훈이 되고 나서서 행동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귀감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됩니다.

 

 

밤하늘이 아름다운 건,

저 수많은 어딘가에 내가 살아온 역사 속의 진실하고 순결했던 삶의 순간들이 숨어 있어서입니다.

 

세상이 아름다운 건,

세상 어디엔가 우리가 살고 싶은 정결하고 가난한 삶을 이미 몸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자렛 산골의 한 처녀,

소리 없이 세상의 구원을 갈망하며 살았던 마리아가 온 세상을 구원하는 어머니가 되었듯 하느님은 작고 보잘것없는 소박한 자리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고 계십니다.

 

오늘도 내가 다녀온 충청도 산골 밤하늘에 온통 별이 빛나고 있을 것입니다.

적막한 산골 마을에서 풀꽃처럼 사는 수녀님들이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오기를 갈망하며 별을 쳐다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분들이 바라보는 이런 희망의 별 하나씩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ㅡ말씀지기에서 발췌 :  편집자 레터 전문(全文) ㅡ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