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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새로운 체험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2-10 조회수710 추천수4 반대(0) 신고

 

 

 <새로운 체험>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마르 8,1-10)



  마르코복음서와 마태오복음서에는 각각 두 번의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이 실려 있습니다. 그 내용도 대부분 일치합니다. 사천 명을 먹인 기적 부분은 여러 가지 사용된 단어들을 볼 때 이방인들을 위해서 베푼 기적이라고 여겨집니다. “감사드리다, 일곱, 바구니”라는 단어가 그리스계교회에서 사용되던 용어라고 보입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가 쓰신 고린도 전서 11장 17-34절 내용을 비교하여 읽어보면 이 대목의 이해가 풍부해집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주님의 성찬”이 “성만찬”과 “형제적인 식사(사랑의 만찬 또는 아가페라 불렸음)”로 이루어졌습니다. "형제적 식사" 때에 각자 집에서 마련해온 식사를 나누어 먹음으로 서로서로 형제애를 나누었고 또 실질적으로 부자들은 넉넉히 빵을 가져다가 가난한 형제들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점차로 이 정신이 퇴색하였습니다. 한 교회에 함께 모였어도 한편에는 배불리 먹고 술까지 취한 사람도 있었는데 다른 편에는 굶주리는 사람들조차 있어 분열양상을 보였습니다.


  이에 사도 바오로는 서간을 통하여 주님의 성찬의 본래의미를 강조하였습니다. 그저 탐욕과 술 취한 것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퇴색시키는 무관심을 질책하였습니다. 사랑과 일치가 결여된 성찬은 주님의 성찬이아니라 자기들끼리의 만찬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행동은 없는 이들을 더욱 창피하게 만들었고, 가난한 이들을 멸시하는 행동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성찬 의미에 합당하지 않은 분열된 모습, 사랑이 없는 모습으로 참여한다면 주님의 몸과 피를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준 목적과 정신을 위배하는 자들은 다시 한 번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 것이 됩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하는 권고는 아주 간단합니다. 우선 다른 사람들을 기다려 주는 일이고, 정 배가 고프면 숫제 전례모임 전에 집에서 음식을 먹고 오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사를 기억하고 모두가 그리스도의 지체로 모였다는 것을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성찬례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공동체가 일치하라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생존에 필요한 본능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최근에 뇌의 구조를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뇌는 크게 세 층으로 나누어진다고 합니다. 뇌간, 변연계, 대뇌피질입니다. 파충류의 뇌에 해당하는 뇌간은 맥박, 호흡, 소화 등 생존에 가장 중요한 대사기능을 담당합니다. 뇌간 위층을 이루는 변연계에서는 식욕과 성욕 같은 감정, 욕구 충동을 관장합니다. 제일 상층부인 대뇌피질은 인식기능, 분별기능, 판단기능, 추론기능을 담당합니다. - 차동엽 신부著, 무지개 원리 참조. 

 

  그런데 여기서 뇌간의 작용에는 쾌감이 주어지지 않으나 변연계의 작용에는 쾌감이 주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숨 쉬고 심장이 뛰는데 쾌감이 주어지면 아마 제대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더 많은 쾌감을 얻기 위하여 한꺼번에 숨 몰아 쉬거나, 한꺼번에 심장 뛰게 한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사는 동안 아무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기능을 합니다.

  이에 반해 쾌감은 억제하거나 더 추구하는 등 선택할 수 있는 사항입니다. 식욕과 성욕은 조절이 가능합니다. 즉 단순히 욕망을 채우기보다 새로운 의미에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것이 대뇌피질에서 판가름 납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자신을 인정받으려 하고, 자기 실현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점에서 동물과 인간이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반성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더 나은 삶에로 변화가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침팬지와 차이 나는 것은 겨우 1.3%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바로 이 점입니다.

 

  인간은 대뇌 변연계의 작용과 대뇌피질의 작용을 스스로 조절하여 지고경험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경험은 단순히 식욕과 성욕을 만족시키고, 재산이나 권력을 성취하는 행복보다 더 크다고 합니다. 선행과 봉사, 사랑 등을 통해 자신의 존재의미를 구현하는 것이 더 지고한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천 명에게 턱없이 적은 개수의 빵을 가지고서 나누어 모두가 배불리 먹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더 많이 거두어들이는 체험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식욕을 만족시키는 쾌감에서 지고한 행복 체험을 갖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과정이 어떻게 기적처럼 이루어졌을까? 하고 궁금해 하기보다는 인간이 단순한 본능적 쾌감에서 벗어나 ‘지고경험’을 집단적으로 그리고 본격적으로 성취하게 만들어 주셨다는 데 의미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일회적인 이벤트가 아니라 언제나 계속해서 기억하고 실천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체험이며 인간으로서 도달해야할 지향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사시고 보여 주신대로 자신을 내어주는 비움과 사랑의 정신입니다. 그 결과 사랑으로 일치하는 하느님나라를 우리 가운데 실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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