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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의 초대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2-11 조회수512 추천수2 반대(0) 신고

 

 

<주님의 초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루카 6,20-26)



  루카복음서에서 말하는 평지설교입니다. 정말 갈수록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대목입니다. 특히 물질적 가치에 최고 점수를 매기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이를수록 더 살에 와 닿는 묵상하기가 곤란해져 옵니다. 많은 분들이 이 대목을 가난과, 기아와, 슬픔과, 박해를 받으면 예수님을 더 가까이 찾게 되고, 그 결과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체험을 하게 되어 미래에 더 행복하게 된다고 묵상합니다. 부자일수록 또 배부르고 웃을 일만 가득하고, 평판을 현세에서 얻은 사람들은 받을 것을 다 받았으니, 주님께서 들어가실 틈이 없게되고 또 주님을 찾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미래에 더 받을 것을 기대할 수 없다하고 묵상합니다.


  구약 성경 요나서를 보면 어느 날 요나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립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아시리아의 도시 니네베로 가서 주님의 징벌이 가까이 왔다고 알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고 싶지 않은 그 임무를 피해 정반대 방향인 타르시스로 가는 배를 탑니다. 그리고 만사 귀찮다는 듯이 잠을 잡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요나를 깨우기 위해 폭풍우를 일으키십니다. 배가 침몰할 위기에 닥치자 선원들이 요나를 깨우고, 요나는 바다 속에 던져집니다. 즉시 폭풍우는 잠잠해지고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낮밤을 지냅니다. 그 물고기가 요나를 해변에 뱉어내어 그제야 요나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니네베 백성들은 모두 회개하게 됩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내리시려고 했던 재앙을 거두십니다. 이에 그럴 줄 알았다며 불평하고, 화가 난 요나는 죽으려고 합니다. 요나는 그 도시가 어떻게 되나 지켜보려고 언덕에 올라 지켜봅니다. 주님은 아주까리 나무를 자라게 만들어 그늘에서 쉬게 만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다음날 장난을 치십니다. 아주까리 나무를 벌레 먹어 죽게 만들고 땡볕에 요나를 괴롭히십니다.


  심리학자는 이 요나의 행동을 “요나 콤플렉스”라고 부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인간을 부르시는데 인간들은 그 부르심에 귀 막고 반대로 엇나가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배 밑창에서 잠든 것은 회피를 상징합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잠재된 위대함에, 또는 미천함에 두려움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막상 주님께서 주신 은총에 놀라면서도, 주님께서 일하시는 것에 믿지 못하고 망서리기만 합니다. 뛰어들지 못합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시편 8,5-6)


  마태오복음서와 루카복음서의 행복선언문은 모두 “신적수동태 구문”으로 쓰였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위로를 해주시고 눈물을 닦아주시며 축복을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 말씀에는 하느님께서 직접 일하고 계시다는 것과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루카 10,23-24)

  

  이것은 일흔 제자들이 선교여행에 돌아와서 예수님께 기뻐하며 보고드릴 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그 여행을 통하여 그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어디서나 제자들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하느님나라에 사로잡힌 무리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저는 몇몇 가톨릭 인터넷 카페에 가입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익명의 고민방’에 자주 들어가 봅니다. 그곳에서 교우 분들이 겪는 어려움을 읽고 자주 눈물짓고 한숨을 짓습니다. 안타깝고, 화도 나고, 원망하기도하고, 무력감이 앞서고 등등 여러 가지 생각들이 교차합니다.

  그러면서 저는 많은 교우 분들이 동참하여 기도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것에서 많은 위로와 힘을 받습니다. 아마 그런 글을 올려 주시는 익명의 교우들도 마찬가지이겠죠. 그리고 사람들의 고민이 많이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생활고, 가족과의 갈등, 신앙고민, 소외감, 사기 당함, 질병 등등입니다.

  

  저는 어느 날부터 감히 이런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삶이 바로 주님께서 살아보라고 초대하시는 것 아닌가하고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남들이 어떻게 여길까하는 시각으로 보지 말고  내게 주시는 초대를 식별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나는 처음부터 주님의 초대를 식별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잠들어 버려 회피하려고 하였습니다. 도망치려고만 하였습니다. 불평불만만 하였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아마 많은 교우님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내용은 가난과, 배고픔, 슬픔, 박해가 모두 주님께서 초대하시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 초대에 응하는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행복이 주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미래에서가 아니라 현재에서 아주까리 나무의 그늘을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제라도 주님의 초대를 잘 식별하여 힘들더라도 따르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마라나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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