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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월 11일 야곱의 우물-루카 6, 17.20-26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7-02-11 조회수631 추천수6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와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루카 6,17.20-­26)

행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혹 불행하고 싶어 못 견디는 사람이 있는지요? 만약 행복하고 싶다면 내가 행복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입니까? 조금 더 넓은 아파트? 자녀가 좋은 대학에 합격하는 것?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 배우자와 마음만 맞으면? 좀더 건강하면? 아니면 무엇인지요? 지금 내가 가장 중점을 두고 힘을 쏟는 것, 그것이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고 믿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진정 이것만 성취되면 더 이상 바라지 않고 평생 행복할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아니오’라고요? 그럼 우리를 평생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행복관과는 정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행복하다고 하시는 사람은 우리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며, 우리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예수께서는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네 번 행복하다는 말에 네 번 불행하다는 말이 대비되는데,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박해받는 사람들이 행복하고, 부유하고, 배부르고, 웃고, 모든 사람이 좋게 말하는 그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에는 그래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데, 루카복음에서는 그냥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하니 더욱 당황스럽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왜 행복하다고 하셨는지 예수님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지난 연중 제3주일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사야서 두루마리를 읽으신 후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시고 오늘 이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억압받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리는 복음이었습니다. 모두가 인간답게 대접받고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의 협조자들을 뽑기 위해 산에 올라가 밤새워 기도하신 후 열둘을 뽑으시고는 산에서 내려오십니다. 곧 평지로 오십니다. 거기에는 말씀에 배고프고, 악령과 병고에 시달린 사람들이 사방에서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행복한 사람, 불행한 사람에 대해 말씀하셨지요.

예수님은 높은 곳에 서서 그들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과 똑같은 수준의 평지에서 그들의 병고를 아는 사람으로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강생이, 30년 동안 숨은 목수생활이, 그리고 밥 먹을 겨를조차 없는 공생활이, 십자가에 달려 죄수 사이에서 죽기까지 우리와 똑같이 사셨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일상의 희로애락을 아시는 예수님은 몰려온 군중을 연민으로 보시면서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행복해야 할 존재입니다! 자, 힘을 냅시다! 내가 그렇게 해주고 싶습니다!”

그러고는 이런 이들 위에 군림하며 한번도 배고파 본 적이 없는 특권을 누리는 소수의 권력자들에게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제물은 짐승의 피와 기름기가 아니다. 고아와 과부를 보살펴 주고, 없는 이들의 인권을 짓밟지 않는 것, 사랑과 자비,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것이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웃을 때가 있으면 울 때가 있고 이 세상 것들은 모두 사라져 가는 것, 그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라.”

 

“누가 하느님의 자녀인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 아닌가. 말씀을 실천하는 그 사람이 곧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니 나누어라. 모두 공으로 받은 것, 하느님의 것이 아닌가. 주는 것이 복된 이유는 기쁨을 누리는 자가 바로 너이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부자야, 오늘 밤 네 영혼을 거두어 간다면 곳간의 그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네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 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으뜸으로 삼고 있지 않느냐? 지금 바로 네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는 결국 네 이웃이 아니냐”고 일깨워 주시는 마음을 읽습니다.

 

사실 예수께 온 가난하고 병들고 억압받은 사람들은 해방을 체험하였습니다.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서는 그분은 병들고 억눌려 신음하는 자녀들에게 더욱 마음 쓰실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를 잉태하였을 때 이미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라고. 그리고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에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라고 찬양하셨습니다. 성모님을 모든 세대가 행복한 여인으로 칭송할 이유가 바로 비천한 처지를 굽어보신 하느님 덕분이라고 하셨다면, 그리고 우리도 그분을 행복한 여인으로 인정한다면 우리 행복의 이유도 거기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하고 배고프고 울 수밖에 없고, 박해받는 사정은 행복의 조건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런 조건에 놓여 있는 나라로 알고 있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는 지수가 가장 높다고 하고, 살아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감사로워서 영혼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오히려 지체장애자들임을 볼 때 예수님의 말씀을 실감합니다.

 

조건이 있는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겠지요. 조건이 사라지면 행복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조건이나 악조건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행복이 진짜 행복입니다. 곧 우리는 어떤 조건에서도 행복해야 할 존재라는 것을 외치고 계시는 듯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하신 예수님의 삶은 머리 둘 곳 없이 가난하였고, 안식일에 밀이삭을 비벼 먹도록 배고팠고, 예루살렘을 향해 그리고 라자로의 무덤을 향해 우셨고, 유다 지도자들에게 모진 박해를 받아 돌아가신 행복한 사람입니다.

지금 나는 행복합니까?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합니까? 그것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라고 봅니까? 지금 나는 불행합니까?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듭니까? 그것이 행복의 조건이 되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까?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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