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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칠갑산의 석양 . . . . . . [윤인규 신부님]
작성자김혜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7-02-12 조회수627 추천수8 반대(0) 신고

 

 

 

 

 

 

사십대 남자가 비좁은 책방에 들어섰다.

다리를 저는 책방 주인과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책방 주인이

 

"야! 이눔아, 너도 여기 오신 신부님한티 잘 말씀드려 승당엘 다녀 봐.

 타고난 본성이 악질이라두 수양을 하면 개과천선하는 법이여."

 

그때서야 책을 고르며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를 발견한

사십대 남자가 나에게 시선을 보냈다.

 

"처음 보겄유..

 신부님은 여태 즈덜 얘기 다 들으셨으니께 한 가지 묻것는디유,

 왜 성경이다, 불경이다, 사서오경이다, 성현들께서 하신 좋은 말씀을

 죄다 읽어도 사는 것은 맨날 마찬가지래유?"

 

책방 주인이 끼어들었다.

 

"! ! 쓰잘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썩어빠진 정신으로 경서를 읽으면 뭐하냐?

 너같이 정신은 썩어가지고 책만 잔뜩 읽어 주둥이만 까진 놈이

 이 세상에 쌔 빠졌어,

 다리가 병신이라 책장사를 하구는 있다마는 수양에는 마음이 없으면서

 지식욕과 명예욕만 꽉 찬 머저리한테 책을 팔고나면 꼭 쥐약을 팔고 난

 기분이 든단 말여."

 

나는 저녁밥을 준비할 시간이 다 되어서야 사제관으로 돌아왔다.

한 마디도 못하고 죽게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이론과 제도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현대의 종교에 대한 반감이 깊은

저들에게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고뇌하는 오늘의 사제들 마음처럼 길고 짙게 그림자가 드리워진

칠갑산 서녘에 석양이 불타고 있었다.

 

그 날따라 달빛은 옥처럼 푸르다 못해 시려왔다.

성당 뜨락에서 뒤척이던 오동잎도 잠이 들어 만상이 고요하였다.

잠이 심연으로 빠져들 무렵,

전화 벨이 울렸다.

밤의 정적과 잠을 동시에 깨웠다.

 

"저 죽을라고 약병 들고 전화하는 건디유."

 

아닌 밤 중에 홍두깨라더니....,

 

"무슨 약 잡수시고 밥 숫가락 놓으실라고 그러슈?"

 

"살충제 농약유!"

 

"약 맛이나 빛깔로 치면 쥐약이 좋고,

 확실히 황천가는 데는 제초제 '말끔이'가 좋다고 하던디유."

 

"아이고, 신부님, 잘도 아시네유...

 워디서 그런 거 다 알아두셨데유?"

 

"작년 대티 최씨도 제초제 먹었다가 병원 문턱도 못 넘고 죽었구유,

 쥐라는 놈은 미식가인 데다가 빛깔이 얼룩덜룩해야 기분이 좋아지는

 놈이라 쥐약은 맛과 빛깔이 좋다는구만유."

 

"신부님하고 얘기하니께 참 재밌네유,

 시상에 태어나서 지 얘길 꼬박꼬박 대답해 주는 양반 츠음 만났네유."

 

죽음을 놓고 우리는 농담을 하고 있었다.

두 시간이 넘도록 전화를 하는 동안 그 여자의 목소리는 밝아져 갔다.

그 무렵 창도 밝아 왔다.

 

얼마후,

첫눈이 내릴 듯한 초겨울 어느 날,

이름도 얼굴도 없이 매일 밤 전화만 하던 그 여자가 사제관을 찾아 왔다.

 

소장수를 하던 남편이 3년 전 여름 어느 날 소를 팔아 농협 빚을 갚고

돌아오다가 경운기에 깔려 죽었단다.

그 날, 집에 한 마리밖에 안 남았던 소마저

칠갑산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 후 살길이 막막해진 그녀는 우울증에 빠졌고

해마다 남편 제사가 돌아오면 심해져 자살을 기도한다는 것이다.

남편을 잃던 날,

숲 속으로 사라진 마지막의 소 한마리를 찾으려고 산에 올라가 헤매다가

겨우 소의 발자국만을 발견하였다.

 

그녀에게 소는 삶의 희망이었고 이상이었다.

그녀의 우울증은 남편이라는 [현실]이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소라는 [이상]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그녀에게 소가 이상이었듯이 나에게는 하느님이 이상이다.

그러나 그녀가 칠갑산 숲에 걸려 소는 찾지 못하고 소 발자국만 보았듯이

 

나도 현실적 욕망의 숲에 걸려 하느님의 흔적만 느꼈을 뿐

만나뵙지는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쌓인 눈에 내 발자국을 남기며  걷고 있었다.

 

 

 

- [치마입은 남자의 행복]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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