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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참전용사 기념탑'을 보며 떠올린 생각들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07-02-14 조회수550 추천수5 반대(0) 신고

 

           '참전용사 기념탑'을 보며 떠올린 생각들

      




<1>

베트남 전쟁 관련 행사를 가질 때마다 자연발생적으로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초등학교 동창생으로 태안 천주교회 초창기 시절 청년회 활동도 함께 했던 강형모(안드레아)라는 친구다. 그 친구는 나로 인해 월남엘 갔다.

나는 1969년 7월 육군 입대 후 1년이 지난 시점인 70년 9월 베트남엘 갔다. 세 번이나 지원을 거듭한 결과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논산 신병훈련소 제28교육연대장 문영창 대령이 두 번이나 내 파월 지원을 받아주지 않고 세 번째 지원을 겨우 허락하여 나는 가까스로 월남에 갈 수 있었다.

백마부대(제9사단)의 도깨비부대(제28연대) 제1중대 전투병으로 정글에서 목숨을 잃지 않고 1년 2개월을 견딘 다음 71년 11월 무사히 돌아왔다. 귀국과 함께 25일 동안의 꿈같은 휴가를 즐겼다. 한 마디로 개선장군이 된 기분이었다.

그때 고국 부대에 있다가 휴가를 온 강형모 동창생 친구를 성당에서 만났다. 월남에서 돌아온 나와 고국 부대에 있다가 휴가를 온 그 친구는 서로 빛깔이 다른 것 같았다. 두 사람을 대하는 뭇 눈빛들이 달랐다. 그 친구는 나를 많이 부러워했다.


▲ 베트남 전장에서의 모습. 1970년 11월쯤이었을 것 같다. ‘도깨비 10호 작전’이었던가. 치누크를 타고 정글 지역으로 들어가기 전에 사진을 찍으면서 어쩌면 내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 싶다.  
ⓒ 지요하

그 후 나는 최전방 중동부전선의 제15사단 38연대에서 철책선을 지키며 나머지 군대생활을 할 때 강형모 친구가 지원을 하여 월남에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친구가 월남에서 전사했다는 소식도….

정글에서 전투 중에 목숨을 잃은 건 아니었다. 중대 전술기지에서 저녁 식사를 한 후 지하벙커의 지붕 위에 않아서 바람을 쏘이고 있을 때 갑자기 날아온 박격포탄의 파편을 머리에 맞고 절명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1972년 5월 제대를 했다. 나는 제대를 하여 고향에 돌아왔지만 그 친구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성당에서 그 친구의 가족들을 대하는 일이 늘 부담스러웠다. 특히 그 친구의 어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아들 생각을 하는 듯했다. "자네는 이렇게 살아서 돌아왔는데…"라는 말을 하며 눈물을 짓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그 친구가 나 때문에 월남에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죄를 지은 것만 심정이 되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 막내 동생과 초·중·고 동창 사이인 그 친구의 막내 동생은 현재 태안 성당에서 나와 함께 레지오 활동이며 성가대 봉사를 하고 있다. 자연 어울리는 시간이 많다. 그와 어울리는 자리에서는 조심을 하게 된다. 지역에서 베트남 전쟁 관련 행사가 있은 날도 나는 일체 아무 얘기도 하지 않는다.

<2>


▲ 베트남참전유공자회 태안군지부장 이.취임식의 한 장면. 김상길 2대 회장이 유영태 3대 회장에게 부대기를 넘겨주고 있다.  
ⓒ 지요하

지난 1월 30일 오후 5시, 충남 태안읍의 한 예식장에서는 '베트남참전유공자회 태안군지부'의 '지부장 이·취임식' 행사가 있었다. 그 단체의 회원이기도 하고, '고엽제전우회'의 회원이기도 한 나는 당연히 그 행사에 참석해야 했다.

'베트남참전유공자회'의 처음 명칭은 '파월전우회'였고, 태안군지부는 1995년경에 만들어졌다. 진태구 현 태안군수가 초대 회장을 했고, 사무국장으로 초창기에 고생을 많이 한 김상길씨가 2대 회장을 했다. 그리고 이번에 유영태씨가 3대 회장이 되었는데, 유영태씨는 내 초교 동창으로 초교 동창 친목 모임인 '신우회'의 멤버이기도 하다.

지부장 이·취임식 행사에 내 초교 동창생들이 대거 참석했다. 그런데 초교 동창생들 중 상당수가 파월 전우였다. 6·25 전쟁으로 취학 적체 현상이 빚어졌다가 한꺼번에 몰린 탓에 다른 기수들에 비해 인원도 많고 나이 차이도 많이 나는 우리 동기들은 군 입대 시기 폭이 넓은 만큼 베트남 전쟁 참전자도 많은 것이었다.

행사 순서의 앞머리를 차지하는 '국민의례' 중에는 '묵념' 순서가 있었다. '베트남 전장에서 산화한 전우들과 고엽제 후유증으로 신음하다가 세상을 뜬 전우들의 명복을 비는' 묵념이었다.

그 묵념을 하면서 나는 다시 강형모 안드레아 친구를 떠올렸다. 홀로 성호를 그었고, 기도를 했다. 내 초교 동기 중에 베트남전 전사자가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태안 성당 초창기 교우이기도 했던 그가 나 때문에 월남에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다시금 가슴을 저미는 듯했다.


▲ 베트남참전유공자회 태안군지부 3대 지부장이 된 유영태씨 부부와 두 아들. 유영태씨는 내 초교 동창이기도 한데 나이는 두 살 위여서 지난해 환갑을 지냈다.  
ⓒ 지요하

한편으로는 내 초교 동기들 중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이들이 무척 많음에도 절대 다수가 살아 돌아와서 오늘 이런 행사 자리에도 함께 참석하고 있다는 사실이 흔쾌한 기분을 가지게 했다. 이 자리에 함께 하며 지금 이 시각 '묵념'을 하고 있는 친구들 중에 혹 전사자 강형모를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있을까 하는 괜한 의문도 들면서, 그 의문이 묘한 쓸쓸함을 안겨주는 것 같았고….

'베트남참전유공자회 태안군지부 지부장 이·취임식' 행사가 수많은 대형 화환과 화분들이 놓이고 이렇다하는 지역 인사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화려하게 치러지지만, 나는 거기에서도 이상한 '허무'를 느끼는 기분이었다.

인원이 계속적으로 보충되면서 생명이 오래오래 유지되는 그런 단체가 아니었다. 잔명(殘命)으로 겨우 존재하는 한시적인 단체였다. 흐르는 세월과 함께 구성원들이 하나 둘 세상을 뜨게 되면 점차 몸피도 줄고, 그렇게 점점 오그라들다가 언젠가는 마침내 자연 소멸될 그런 공동체였다.

나는 잔명의 안타까운 되새김질을 보는 기분이었고, 그리하여 행사에 참석하고 있는 구성원 모두에게 야릇한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지레 가슴에 안겨지는 허무와, 잔명의 힘겨운 되새김질을 보는 듯한 연민으로 말미암아 나 자신이 다시금 기이하게 느껴지는 슬픔 같은 것도….

<3>


▲ 태안군 원북면 반계리 '이종일 선생 생가 유적지' 안에 건립된 '태안군 참전용사 기념탑'의 모습. 2월 7일 오전에 제막식 행사가 있었다.  
ⓒ 지요하

이른바 '비석'이라는 것에 내 이름자가 새겨진 경우는 벌써 여러 번이다. 1982년 안면도 승언리의 한 길체에 독립투사 이종헌 선생(대한광복군 서산군지단장) 추모비가 건립되었는데, 그 비석에 내가 지은 '헌시'가 새겨지면서 내 이름도 새겨지게 되었다. 그것이 최초의 경험이다.

1992년 태안군 근흥면 용신리에 태안 지역 최초 등단 문인으로 고향 땅 문학 운동의 최초 불씨를 지폈던 문학평론가 이래수씨(동국대 교수)를 기리기 위한 문학비가 건립되었는데, 그 비석의 비문을 지은 덕에 내 이름자도 함께 새겨지게 되었다.

1995년에는 '태안청년회의소(JC)'가 창립 20주년을 맞아 '군민체육관' 주변에 조경 사업을 하고 그곳에 기념비를 세웠는데, 그 기념비에 내가 지은 '태안찬가'라는 시가 새겨지면서 내 이름자도 새겨졌다.

그리고 올해 또 한 번 내 이름이 비석에 새겨지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태안군 원북면 반계리에는 '33인' 중의 한 분이신 민족지사 이종일 선생 생가 유적지가 있다. 그 유적지 한 곳에 '태안군 참전용사 기념탑'이 건립되었는데, 그 기념탑 앞 여러 개 비석들 중의 '국가유공자 상이군경' 비석에 내 이름이 새겨진 것이다.


▲ 기념탑 앞 도합 8개 비석 중의 하나인 '국가유공자 상이군경' 비석에 새겨진 168명의 이름 중에 내 이름도 있다.  
ⓒ 지요하


지난 7일 오전 11시 '태안군 참전용사 기념탑 제막식' 행사가 현지에서 있었다. '태안군참전용사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조항설)'가 주최하고 태안군과 국가보훈처가 후원한 행사였다. 기념탑 건립 비용은 충남도·태안군 예산과 지역사회의 찬조금으로 충당되었다.

그리고 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에는 태안군의 상이군경회장, 6·25참전유공자회장, 베트남참전유공자회장, 미망인회장, 유족회장, 재향군인회장 등이 위원으로 참여했다.

태안군에는 6·25참전유공자가 현재 822명에 이른다. 그리고 베트남참전유공자는 386명이다. 두 곳 모두 상이군경을 뺀 숫자들이다. 상이군경은 도합 168명에 이른다. 그러니까 총 1376명의 이름이 기념탑 앞에 설치된 8개의 비석에 새겨진 것이다.

나는 베트남참전유공자지만 고엽제로 인한 상이자라서 '국가유공자 상이군경' 비석에 이름이 새겨지게 되었다.

모처럼 만에 군복 차림으로 기념탑 제막식 행사에 참석했다. 제막식 행사를 끝까지 지켜본 다음 기념탑과 베트남참전 부대기(旗)들이 명각된 비석이며, 1376명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들을 살펴보자니 기쁘기보다는 슬픈 감회에 젖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또다시 베트남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강형모 안드레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오늘도 이렇게 살아 있는 사람들보다는 6·25전쟁 때, 또 저 베트남 전장에서 산화한 이들의 이름을 새기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금 강형모 친구를 비롯한 모든 전사자들에게 미안해지는 마음이었다.

비석에 이름이 새겨진 사람들도 세월과 함께 하나 둘 세상을 뜨게 되고, 언젠가는 모두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게 될 터였다. 돌에 새겨진 이름의 가치는 무엇일까? 이렇게 집단적으로 새겨진 이름들은 그대로 한결같이 '무명'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훗날 어느 누가 이 이름들을 보며 숙연한 마음으로 역사의 '흔적'을 체감하게 되더라도, 그것은 단지 덧없음을 확인하는 것일 터였다.


▲ 기념탑 제막식 행사에서 '헌시' 낭송을 한 김난주 시인과 함께  
ⓒ 지요하

6·25전쟁으로부터 54년이 흐르고 있는 오늘 그리고 베트남 전쟁으로부터 34년이 지나고 있는 시점에서 충남 태안군의 한 곳에 세워진 '태안군참전용사기념탑'도 언젠가는 비석에 이름이 새겨진 이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세상에 홀로 남게 될 터였다. 그리고 그 기념탑 자체도 인간들의 기념의 세계에서, 이 세상에서, 이 세상과 함께 사라지게 될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비석 따위, 티끌 세상의 흔적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 매우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티끌 세상에 흔적을 남기기보다는 저 하늘 나라에 공을 쌓고 이름을 올리는 것을 더 중요한 일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벌써 네 군데나 비석에 이름이 새겨진 것이 부담스럽다. 더욱이 전쟁을 기념하는 비석에 이름이 오른 것은 자랑스럽지 못한 면이 있다. 이런저런 여러 가지 사항들을 종합적으로 살피면 결국 그 모든 일들이 하늘나라의 공(功)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귀착하게 된다.

다시금 그런 마음을 안고 원북면 반계리를 떠나오면서 35년 전 나 때문에 베트남 전장에 가서 목숨을 잃은 강형모 안드레아를 떠올리며 운전대 잡은 손으로 성호를 긋고 묵주를 쥐었다. 베트남 전장에서 산화한 수많은 영혼들을 위해 오늘 기도하는 일도 내 몫으로 남겨진 셈이었다.  


  2007-02-14 11:00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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