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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월 18일 야곱의 우물- 루카 12, 35-40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7-02-18 조회수469 추천수2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루카 12,35-­40)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오늘은 우리의 설날입니다. 차례도 지내고 떡국도 먹고 세배도 드립니다. 요즘은 세배의 의미가 세뱃돈에 있는 것같이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만, 세배를 받은 어른들께서는 건강하고 좋은 한 해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기대로 덕담을 해주시지요. 음력 새해 첫날인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덕담은 무엇일까요?

오늘 제1독서는 민수기 6장 말씀입니다. 이 대목은 대축제의 전례, 특히 가장 중요시했던 신년축제 전례가 끝날 때 사제들이 백성에게 어떤 말로 축복을 빌어주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이보다 더 좋은 복이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은 온갖 좋은 것은 하느님한테서 비롯되고, 하느님과 생활을 함께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인식을 전제합니다. 그 하느님의 축복은 이스라엘 백성이 계약을 충실히 지킬 때, 곧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모든 명령을 성심껏 실천하면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성읍 안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 몸의 소생과 너희 땅의 소출도, 새끼소와 새끼양을 비롯한 너희 가축의 새끼들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의 광주리와 반죽통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들어올 때에도 복을 받고 나갈 때에도 복을 받을 것이다”(신명 28,3-­6). 광주리와 반죽통까지 복을 받는다니 신나지 않습니까?

제2독서 야고보서 4장은 장사에만 정신이 팔려 돈 벌 궁리만 하는 사람들, 자만심에 사로잡혀서 자신들이 모든 상황과 생명까지도 다스린다고 생각하면서 돈으로 안정된 삶을 확보하려는 자들에게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야고 4,14ㄴ-15)라고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정녕 천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때와도 같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 …저희 햇수는 칠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 그 가운데 자랑거리라 해도 고생과 고통이며 어느새 지나쳐 버리니 저희는 나는 듯 사라집니다. …저희의 날수를 셀 줄 알도록 가르치소서. 저희가 슬기로운 마음을 얻으리이다”(시편 90,4-­12)라고 노래한 시편 작가의 가르침과 통합니다.

곧 우리가 삶의 근거를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하는지를,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인식하며 살아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아침에 피어났다 저녁에 말라버리는 풀잎 같은 인생의 유한한 날수를 셀 줄 아는 것, 베네딕토 성인의 말씀처럼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사는’ 지혜를 말함입니다. 마치 오늘이 마지막 날인 듯 진지하게 정성을 기울여 하루를 살 수 있다면 정녕 깨어 있는 날들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말씀은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는 주님의 당부입니다. 짧은 구절 안에 ‘주인’이란 말이 다섯 번이나 나오니 ‘주인’이 중요한 분인가 봅니다. 깨어 기다려야 할 이유가 주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는 종들이 얻는 보상은 ‘행복’입니다. 가난한 자들이 얻는 행복입니다. 이제는 주인이 오히려 띠를 띠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서 시중을 들어주시니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묵시록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문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깨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제때에 문을 열어드릴 때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깨어 있는 종의 태도는 탈출기에서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과월절 음식을 먹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12,38). 주인이 그토록 기다릴 만한 분이었을까요? “파수꾼들이 아침을 기다리기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네”(시편 130,6)라고 할 만큼? 사실 보고 싶은 마음, 그리운 마음이 없다면 종들이 주인을 만났을 때 행복해할 리가 없습니다. 깨어 있는 종들은 주인이 맡기고 간 탈렌트를 기쁜 마음으로 능력껏 불려놓은 충실한 종들과도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 말씀처럼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1테살 5,2) 오지만 그들은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희망을 투구로 쓰고 깨어 있는 자들입니다.

늘 깨어 준비하고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늘 긴장하고 있으란 말일까요? 어떻게 잠도 자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늘 깨어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우리의 삶을 엮어가는 것입니다. 수도생활에서 하루의 기둥은 아침·점심·저녁 그리고 끝기도입니다. 기도의 네 기둥 사이사이에 일과가 들어가서 지붕도 만들고, 벽도 만들고 문도 만들어 하루라는 집을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간경은 나머지 일들을 성화시킨다고 믿습니다. 수도자들과 똑같이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면 새날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고, 그날의 영적 양식으로 복음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 일하면서 틈틈이 그 말씀을 되새기는 것, 밤에 성난 채 잠자리에 들지 않는 것, 곧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듯 정리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을 하루의 중심축으로 삼고, 다른 모든 일이 그 사이에 들어가게 하여 하루가 돌아가게 한다면 분명 우리는 깨어 있는 종으로 사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 삶은 광주리와 반죽통까지 복을 받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새해 덕담입니다.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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