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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버지의 유산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7-02-20 조회수1,136 추천수17 반대(0) 신고

 

 

 

아버지는 오후 4시에서 5시면 어김없이 한 시간씩 글씨를 쓰셨다

중국어, 일어, 영어....

 

"아버지, 그거 써서 뭐하시려구요?"

한 겨울, 불도 켜지않은 어두운 부억 식탁에 놓인

빼곡하게 글자가 박혀있는 공책을 보고 물었다

 

"이제 나이를 먹으니 글씨가 자꾸 잊어버려져서..."

겸연쩍어 하시며 공책을 치우셨다

 

"아흔이 내일 모렌데, 잊어버리면 어때요?"

퇴행성 관절염 때문에 엄지가 구부러져 있는 손으로

작은 글씨를 힘들게 써내려가는 것이 안타까워 하는 말이다

 

"그냥 손 연습도 할겸, 머리 연습도 할겸 하는거야"

 

 

평생을 아버지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지독한 연습과 어김없는 훈련으로 사신 분이다

 

다섯시면  일어나셔서 자리를 개키고, 말끔히 닦으신 후,

온 식구들 하나씩을 위한 기도를 바치셨다.

 

기도가 끝나면, 체조가 시작된다. 

일생동안 하루도 거름없이 한 시간씩 하셨던

아버지 건강의 최고의 비결인 체조.

 

내 어릴 때는 마당 한편에 이단 철봉이 있었고

그곳에서 아버지는 거꾸로 서고 돌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신기한 묘기를 펼치셨다.

 

 

 

아버지의 일과는 언제나 분주하셨다.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엄마를 위해 과일과 야채 셀러드를 만드시고, 

아버지의 화분과 화단에 물을 주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셨다

 

아버지의 일과는 늘 시계 바늘처럼 정확하셨다.

아버지가 일어나 두손을 모으면,

그 시간은 보나마나 6시, 12시, 6시, 삼종기도 시간이다.

 

아버지의 배꼽 시계도 정확하다.

8시에 아침, 12시에 점심, 6시면 저녁.

어쩌다 가족이 모두 모여 외식을 하는 날에도

우린 가급적 이 시간에 맞추어야 한다.

 

식단도 늘 고정되어 있다.

아침은 양식, 점심은 한식, 저녁은 약식.

그 큰 틀 안에서 온갖 다양한 메뉴가 풍성히 마련되어졌다.

 

 

 

아버지는 매사가 당신 자신의 式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남들에게까지 그 틀을 강요하지는 않으셨다.

 

며느리와 사위에게는 물론,

아들과 딸, 심지어 엄마에게도 그러지 않으셨다.

 

 

오랫동안 일본에서 사셔서 그런 것도 있고

워낙이 당신의 성품도 그러하셔서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것

다른 사람에게 신세를 지는 것을 몹시 싫어하셨다.

 

 

심지어 자식들이 의당 해야 할 일을 하는데도

늘 "고맙다"는 말씀이 입에 달려있는 분이시다.

 

 

 

그런 아버지가 오랜 병상도 아니고

병이 발견된지 단 한달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엄마가 먼저 갈까봐 늘 걱정하시더니...

아버지의 딱한 기도를 하느님이 먼저 들어주신 것일까?

 

그 짧은 기간 동안에도 아버지는

당신을 위해 달려오고, 병원과 집을 번갈아 모시는 동안

잊지 않고 말씀하셨다.

 

"우리 딸, 아버지 때문에 고생이 많구나"

"우리 아들, 아버지 때문에 수고가 많구나"

 

 

말 뿐이 아니라 아버지는 정말로 그런 일을 못견뎌하시는 분이시다.

 

가능하면 혼자 모든 일을 하시려했고,

밤에도 부축을 받지 않고 화장실을 가시려고 애를 쓰셨다.

한번 다녀오시면 진땀으로 온 몸이 범벅이 되실 때까지도...

 

그런 일은 생전처음 아버지가 겪는 일이셨다.

더 이상 당신 힘으로는  도저히 화장실에 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의 좌절감.

 

먼저 가신 시아버님이 지팡이를 처음 짚으시던 날,

힘없이 흘리시던 눈물이 기억 속에 되살아났다.

 

 

그날, 옆 병상의 개신교 장로에게

아버지로서의 자존심을 말씀하셨다.

 

"아무리 이렇게 되었어도, 부모는 부모고, 자식은 자식이다."

 

참을 새도 없이 튀어나온 오물을 뒤집어 쓴 딸에게 너무나 미안해서 안절부절 하시던 아버지.

 

아무 일 없는 듯이 아버지를 어린아기처럼 닦아주고, 등을 쓸어주고, 부축해주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동안에 하신 말씀이었다.

 

또 그런 일이 생길까봐, 자꾸 아버지 가까이 오지 말라고

그 걱정만 하시던 아버지. 

 

 

 

마지막 면회 때, "우리 딸 왔구나."

반가이 맞으시며, 엄청나게 말씀을 많이 하시더니

"너희도 고생이고, 나도 고생이니 그만하자~ 그만하자~" 하셨다.

 

진통제를 놓아달라고 할까 물으면

"병자가 이 정도 안아프면 되겠냐" 하며 끙끙 참으시던 분.

 

초인적인 인내로 아픔을 참으시던 아버지가

"무지 무지하게 아프다"는 말씀을 하실 때,

그것이 마지막 인내의 한계였음을 눈치챘어야 했다. 

 

 

난 아버지가 천국에 들어가셨을 것으로 확신한다.

 

간성혼수 상태에서도 밤 새도록, 중얼중얼 외우셨던 기도문.

예수님이 찾아 오셧는지, 성모님이 머리 맡에 앉아 계셧는지

"주님, 감사합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감사는 그분의 입에 습관처럼 달려있는 단어다.

 

병원에 계신 동안도,

간호사에게나, 의사에게나, 누구에게나

"나 때문에 고생이 많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말을 입에 달고 계셨다.

 

담당 의사는 "할아버지가 너무나 좋으셔서 아무 처치를 해줄 수 없는 것이 정말 안타깝다" 고 하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하늘나라에서 성모님을 통해 더 좋은 처치를 받고 계실 것이다.

 

 

"믿는 이들이 가는 곳이 어디냐?"

"어디긴 어디야? 아버지!, 그곳이 바로 천국이지."

"그곳은 어떻게 가는거냐? 일열로 가는거냐? 남자 여자 따로 가는거냐?"

끙끙 앓는 신음 소리에 의식이 들어왔다 하시면서

안 되겠다는 예감이 드셨는지 그런 것들을 물어보셨다.

 

"나도 안가봐서 모르지~ ㅎㅎ.. 하지만 하나두 걱정말아요.

아버지가 힘들게 찾아 가시지 않아도 예수님이 오셔서 품에 안고 가실거니까..."

그 말이 무척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일생을 당신 힘으로 고생하고 노력한 것으로만 일가를 이루었던 분.

그런 분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천국을 찾아갈 수 있을까 무척 걱정되셨나보다.

당신은 아무 힘도 안들이고, 예수님이 안고 들어가신다니...

 

"내가 예의없는 사람이 아닌데..."

"내가 건방진 사람이 아닌데..."

 

병자성사를 주러 오신 신부님과,

봉성체를 해주시러 오신 수녀님께

당신이 누워있을 수밖에 없는 것을 여간 죄송해하며 되뇌이시던 말씀이다.

 

 

아버지의 고통도 끝나고,

우리의 고생도 끝나고, 

어제 하루, 긴 잠 꿈 속에서

 

아버지를 위한 구일기도를 하던 기도 상 위에,

성요셉상이 들어 와 있는 것을 선명하게 보았다.

 

아버지의 수호 성인인, 요셉성인이 내 기도 상 위에 오셧다는 것.

 

생전의 아버지가 우리 가족 하나하나를 위해,

새벽 5시부터 한 시간씩 무슨 일이 있어도 꼬박꼬박 기도하셨듯이...

 

이제부터는 하늘에서 요셉 성인과 함께 기도하시며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그곳에서도 변함없이 하시겠다는 약속으로 생각된다.

 

 

 

 

아버지는 평소의 당신 모습대로

딸의 빡빡한 일정을 모두 비껴 한점의 폐(?)도 끼치지 않고 가셨다.

 

세 군데의 성당에서 네 시간의 교리를 맡고 있고

3월 한달, 4주의 특강까지 맡아놓은 딸.

 

그 일정을 모두 피해

명절 연휴 동안에 일을 다 치르게 하셨다.

 

방사선 치료로 한달간 입원하셨다 나온 후,

쉬지도 못하시고 아버지 간병 때문에 무리를 하시는 엄마를 위해

짧은 삼일장을 일부러 선택하셨던 것일까?

 

명절 준비를 해야하는 문상객들의 바쁜 일정을 고려하시기라도 하듯

7분을 남겨놓은 오후 11시 53분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모든 일이 술술 풀려, 예정보다 빨리 끝나고

장지에서 돌아오는 그 시간부터 도로는 

귀향 인파로 막 밀리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병 수발이 너무나 길어 힘들지도 않고,

딱 아쉬운 기간만큼 앓다 돌아가셨다고 

아버지의 복이고, 유가족의 복이라 하였지만

그것이 가장 우리 아버지 다운 모습이라 생각하며 마음 속으로 아버지께 감사하고

그렇게 허락하신 하느님께도 감사드리고 있었다. 

 

단 하나, 언제나 새로운 것을 배우기 좋아하는 면에서는

당신을 꼭닮은 딸의 며칠 안남은 졸업식을 보여드리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아쉽다.

 

얼마나 좋아하셧을까?

얼마나 장하다고 하셨을까?

 

 

 

아버지!

 

나에게 생명을 전달해 주시고

생에 대한 굳은 의지와 성실성을 가르쳐주신 분.

올곧은 정직성을 몸에 배여준 분. 

 

검소함과 근면성으로 일생을 살아내신 분.

오로지 자기 힘으로 세상을 살아내신 분.

예수님을 알고 나서는 그분께만 의지하신 분.

 

외로운 독자로 태어나 사람을 가리지 않고 좋아하고,

어떤 사람에게도 친절하고 감사할 줄 아시던 분

 

자기 자신에게는 언제나 철저하셨으면서도

다른 사람에게는 언제나 너그러우셨던 분.

 

 

아버지처럼 나도 죽을 때까지

일생 새로운 것을 배우며, 배운 것을 훈련하고,

훈련된 것을 몸으로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이인옥 (smalllark) (2007/02/11) : "너 어디 있느냐?" ...지거쾨더의 십자가 예수님 처럼 만신창이가 된 아버지 옆에서 하룻밤을 꼬빡 새고 이제 돌아왔습니다... 담낭암이 간과 췌장까지 퍼져서 급속도로 하루가 다르게 병세가 악화되고 있는 아버지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가망이 없다고 하니 큰 고통없이 주님 품 안으로 편히 가시도록이요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도 어렵지만, 생명을 마치는 것도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런 연약한 흙 먼지 사람들이기에 그토록 애간장 녹게 사랑하시는가봅니다..... --;

 

 

2월 10일, "너 어디 있느냐?" 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려놓고,

그 글에 다시 달아놓았던 꼬리글이었습니다.

새삼스럽네요.

 

 


Beetoven Moonlight sonata o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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