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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월 25일 야곱의 우물- 루카 4, 1-13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7-02-25 조회수562 추천수3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 그 기간이 끝났을 때에 시장하셨다. 그런데 악마가 그분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한순간에 세계의 모든 나라를 보여주며 그분께 말하였다.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너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주리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
(루카 4,1-­13)

우리의 신앙생활의 여정에서 늘 함께 따라오는 유혹과 고통을 실감하는 사순절입니다. 그러나 이 유혹과 고통은 비단 우리뿐만 아니라 루카 복음사가의 초대 공동체에도, 예수께도 있었음을 ‘광야의 유혹’에서 봅니다.

세례를 통해 성령으로부터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임을 깊이 체험한 예수께서는 역시 성령의 인도로 광야로 갑니다. 아시다시피 성경에서 40이란 숫자는 늘 중대한 일을 앞둔 준비 기간이었지요. 예수께서도 공생활을 앞두고 광야에서 사십 일을 준비하십니다.

준비! 어떤 일을 하기 전 꼭 필요한 작업입니다. 사실 인류는 구세주의 탄생을 몇천 년간 기다리며 준비했습니다. 때가 차서 마리아에게 예수가 태어났지만 마리아가 준비된 여인이 아니었다면, 이해할 수 없는 천사의 말에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자렛에서 조용히 삼십 년을 준비하시고 드디어 출가하셨으나 공생활 시작을 앞두고 다시 사십 일을 준비합니다. 일의 결과가 중요하듯 과정 또한 중요합니다. 일의 대부분은 잠시의 결과를 위해 오랜 시간을 준비합니다. 결과는 준비한 만큼, 정성을 기울인 만큼 따라옵니다. 또한 결과보다도 준비할 때가 더 의미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좋은 결과를 기다리는 것은 요행을 바라는 것이겠지요. 예수께서도 이렇게 준비하셨기에 공생활을 하느님의 뜻대로 다 이루실 수 있었다고 봅니다. 광야에서 유혹과 대면하신 예수님은 앞으로의 공생활 노선을 확고하게 결정하십니다.

아무것도 없는 삭막한 광야에서 성령과 악마가 대면합니다. 악마가 제시하는 빵, 권세와 영광, 하느님의 아들임을 나타내 보이는 세 가지 유혹에는 우리가 겪는 모든 유혹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혹은 마치 뱀이 여자를 유혹할 때처럼 그렇게 은밀하고 교묘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먹어야 사는 데 대해 ‘사람이 빵만으로 살 수 없고 하느님 말씀으로 살아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굶주리는 이에게 하느님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빵을 갖다 주는 것이 더 실질적입니다. 그럴 때 그 빵은 하느님을 대신 전합니다. 형제 중에 가장 작은 이에게 해준 것이 바로 예수님께 해준 것이요, 빵을 갖다 주는 나의 행위 안에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빵이 사랑과 연민에서가 아니라면 바오로의 말씀처럼 그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께서는 굶주리는 이들에게 빵을 주셨지만 당신을 위해 빵을 만든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우선순위에 두고 살고자 할 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의 뜻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어떤 때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음식을 즐겨 드시기도 하셨습니다만, 먹는 것도 굶는 것도 모두 하느님 중심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신 예수님은 결국 자신을 빵으로 내놓으셨습니다. 말씀인 그분은 우리도 자신을 빵으로 내어 주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먹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살 만큼 되면 우리는 다른 데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이름을 날리고 싶거나 세력을 행사하고 싶어합니다. ‘황우석 사건’을 통해 우리는 이름을 날리고 싶은 욕망의 허망함을 보았습니다. 또 세력을 행사하는 나라들은 평화를 위한다는 구실로 첨단의 살상무기를 생산해 생명을 위협합니다. 유명세와 세력, 재력을 갖춘다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될 것임에도 예수께서는 명예와 권력에 마음을 두지 않으십니다.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 없기에 오직 하느님께만 경배하고 그분을 섬기기로 결심하십니다. 하느님 이외의 것에 의존하는 하느님 나라였다면 그리스도교는 오늘날까지 존속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구든 자신을 높이고 싶은 자는 섬기는 자가 되라’ 하신 말씀대로 섬기는 삶을 택하신 것입니다. 나아가 힘없는 자의 무력한 모습을 수난에서 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어떤 표징도 보이지 않으셨고, 어떤 힘도 행사하지 않으시고 고스란히 고통을 다 받으시는 힘없는 자로 사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 다음은 종교적 정체성에 대한 유혹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던져 보시오”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시험해 보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임을 아시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뜻을 앞지르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아버지의 뜻 앞에 순종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이 끈질긴 유혹은 특별히 생의 가장 힘들고 어두운 고통의 순간인 십자가에까지 따라와서 기세를 부렸습니다.

 

‘정말 하느님이 보낸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라고. 억울하게 죽어야만 하는 상황에서 아무리 불러도 응답 없는 하느님을 그래도 믿을 수 있을까 자문해 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굶주린 사자의 밥이 되는 박해를 받는데도 아무런 조처도 취하시지 않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죽어갔듯이 그렇게 믿을 수 있을까요?

 

꼭 필요한 그때 조처를 취해주시지 않는 하느님, 그런 하느님을 신뢰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런 믿음이야말로 참된 믿음이라고 여겨지지만 이렇게 순수하게 하느님을 신뢰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받드는 것은 그분의 의지대로 내가 되어지는 것이지, 하느님이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공생활 동안 오직 하느님 이름 하나만 붙들고 자유롭게 당신의 길을 펼쳐 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사로잡는 예수님의 매력입니다.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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