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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동생의 재혼을 원하는 형의 심정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07-02-28 조회수671 추천수3 반대(0) 신고

                              동생의 재혼을 원하는 형의 심정 
                               홀아비 동생을 위한 고백
  

 



<1>

'장명수' 해변을 걸으면서 동생을 생각하는 때가 많다. 장명수 바다는 해마다 늦여름에서 초겨울까지 동생이 망둥이 낚시를 하러 즐겨 찾는 곳이다. 매년 그 무렵에는 휴일마다 망둥이 낚시 재미에 푹 빠져서 사는 동생은 바다의 '물때'를 거의 꿰고 있다. 물때와 매수를 정확히 아는 나머지, 가령 사리 때의 몇 매 물은 장명수 해변 어느 선까지 오르는지를 다 안다. 사리 물의 속도와 높이를 잘 알고, 또 장명수는 몇 매 물일 때 낚시하기가 좀 더 유리하고 망둥이도 잘 물린다는 것을 익히 아는 것이다.

안면도 신야리, 이원면 내리, 근흥면 정산포, 소원면 법산포, 남면 진산리 등 이곳저곳 원근을 가리지 않고, 물때를 맞추어 새벽이고 낮이고 간에 부지런히 망둥이 낚시를 다니는 동생은 그래도 장명수를 가장 많이 찾는 것 같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일 뿐만 아니라 뭍에서 바닷물로 들어가는 갯벌 길이도 가장 짧고 물고기들의 통로인 갯고랑도 제일 명확하기 때문일 터이다.

동생은 장명수로 망둥이 낚시를 하러 갈 때는 종종 아내와 아이들도 데리고 갔던 모양이다. 해변의 모래톱이나 자갈밭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놀게 하고, 가족의 노는 모습을 보면서 가까운 갯고랑에서 낚시를 하는 것은 더욱 재미있었다고 했다.

지난해 추석날 오후 아내와 동생과 함께 남면 진산리 해변을 찾은 적이 있다. 장명수 바다의 한쪽인 진산리 해변에 앉아 건너편 근흥면 안기리 쪽을 바라보면서 술 한 잔을 할 때, 동생이 가족을 데리고 종종 장명수를 왔었던 일을 추억했다.

그 얘기를 듣고 아내는 "아니, 우리는 나들이를 헐 때마다 꼭꼭 작은집 가족을 데리구 댕기는디, 규왕이네는 우리 모르게 자기들끼리만 소풍을 헌 적들이 있단 말요? 세상에, 그러면서도 우리 헌테는 시치미를 뚝 떼구 살었다니…" 라고 우스개 푸념을 했지만, 나는 동생에게 그런 면이 있었다는 사실에 이상한 다행스러움 같은 것을 느꼈다.

동생은 제수씨 생전에 가족과 함께 했던 장명수 소풍 추억을 얘기하던 끝에 이런 말을 했다.

"그런디 바람이 부는 날은 규왕 엄마가 힘들어했어요. 갯바람을 쐬면 이상허게 머리가 아프구 어지럽다구 해서 오래 있지 뭇허구, 낚시두 포기허구 일찍 집이 들어간 적두 있지요."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왜 동생이 자기 아내의 그런 '이상한 상태'를 가족에게 얘기하지도 않고, 그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았는지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일이었다.

동생은 "그게 다 이유가 있었는디, 둘 다 뇌혈관 쪽 의학 상식이 너무 웂어 갖구, 그저 약헌 체질 탓으루만 여기구 살었으니…. 이제 와서 안타까운 얘길 허면 뭐헌대유. 다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지 뭐" 라는 말도 했고, "생각허면 규왕 엄마헌티 참 미안허지요. 남편인 내가 너무 안이허게 대처헌 것은 변명의 여지가 웂는 일이니께유"라는 말도 했다.

나는 동생의 그런 말들을 들으며, 지난해 초 어느 날(그러니까 제수씨 장례를 치른 얼마 후) 동생이 제수씨 묘소 앞에서 한 말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규왕 엄마가 다른 남자와 만나 결혼 했으면 뇌혈관 기형을 일찍 발견허구 조기에 치료해서 오래 살 수두 있었을 텐디…."

<2>

동생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무거운 죄책감을 안고 있는 듯하다. 자신의 안이한 대처로 아내를 죽게 했다는 생각으로 늘 세상 떠난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도 갖고 있는 듯하다('안이한 대처'라는 말은 늘 내 마음에도 무거운 자책감을 드리우고 있다).

동생은 지난해 여름 어머니와 형의 권유를 받아들여 우리 태안 성당의 새 성전에 '성인상' 하나를 봉헌했다. 제수씨의 수호성인이신 요안나 성녀상이다. 동생은 세상 떠난 아내를 위해 기꺼이 300만원을 일시불로 지출하면서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보면 동생의 기본적인 신앙심은 확실하고도 분명하다. 동생의 그런 기본적인 신앙심 때문에 제수씨의 주보 성녀상 봉헌도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동생은 세상 떠난 아내의 영혼을 돕는 일에도 전혀 무관심하지는 않은 것 같다. 지난해 아내의 생일과 기일의 위령미사 예물에도 신경을 써주었다.

하지만 동생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일체 하지 않는다. 주일에도 출근을 한다. 출근을 하지 않는 주일에도 미사 참례를 하지 않는다. 망둥이 낚시가 우선이고, 낚시 철이 아닌 때도(심지어는 한겨울에도) 휴일에는 바다에 가서 이것저것 '갯것'을 잡아온다.

(전생이 어부였는지 동생의 '갯손'은 여간 걸지 않다. 주일 미사를 철저히 외면하고 바다를 찾는 동생을 탓하면서도, 동생이 잡아오는 망둥이며 여러 가지 푸짐한 갯것들을 즐겨 먹는 내 쪽의 묘한 '모순'은 나를 더욱 헛심 빠지게 한다.)

동생은 자신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것을 아내가 생전에 가장 섭섭해 하고 마음 아파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주일에 온 가족이 손을 잡고 함께 성당에 가는 것이 평생의 '꿈'이라고 했던 아내의 말도 동생은 기억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동생은 계속해서 신앙생활을 기피하고 있다. 아내가 세상에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마찬가지다. 그런 동생을 보노라면 아내의 별세와 관련하여 아내에게 가지는 동생의 미안한 마음, 그 죄책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나로서는 더욱 난감할 뿐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신앙생활을 기피하는 동생이 그래도 성당에 가는 날이 일 년에 두 번 있다. 추석날과 설날이다. 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음복을 한 다음(설날에는 세배 행사를 가진 다음) 가족 모두 성당에 가서 '합동위령미사'를 지낼 때는 고맙게도 자리를 지켜준다. 언젠가 한번 한가위 미사에 빠진 적도 있고, 매번 '마지 못하는' 기색이어서 가족 모두 동생이 명절 미사에 참례하면 안도하며 고마운 마음을 갖는다.

그런데 동생은 올해의 설날 합동위령미사에 참례하지 않았다. 가족 모두의 기대와 요구를 뿌리치고 끝내 성당에 가지 않았다. 합동위령미사 대상에는 당연히 아내도 포함되건만, 규왕 엄마를 위해서라도 함께 가자는 말도 통하지 않았다. 이유는 "일년내내 신앙생활을 하지 않다가 명절날 삐쭉 한번 성당에 가는 것이 너무 부담스럽다"는 모호한 한마디였다.

<3>

설이 다가오면서 어머니와 나는 일찍부터 동생에게 처가에 신경 쓸 것을 권유했다. 그 권유가 주효했는지 동생은 설 열흘 전인 지난 8일, 날씨 관계로 일터에서 일찍 돌아온 것을 기회 삼아 딸 규빈이를 데리고 처가를 다녀왔다고 했다. 사과 한 상자와 함께 장인 장모께 50만원을 드리고 저녁까지 먹고 왔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며 어머니와 우리 부부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동생의 처가 방문 답례로 10일에는 동생의 장모님과 막내 동서 부부의 우리 집 방문이 있었다. 동생의 장모님은 여러 가지 농산물을 선물로 가져오셨다. 제수씨가 없는 허전한 상황 가운데서도 두 사돈집의 왕래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흐뭇한 마음을 가졌다. 일찍 처가를 다녀온 동생에 대한 고마운 마음도….

그런 연유로 동생이 설 명절 다음날 당연히 처가를 다녀올 줄로 알았다. 동생이 아이들을 데리고 명절에 처가를 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고, 제수씨가 살았을 때는 한 번도 거르지 않은 일이었다.

설날 저녁을 먹으면서 두 형제의 설 다음날 일정에 대한 얘기도 있었다. 나는 가족과 함께 공주 처가를 다녀올 계획이었다. 동생도 아이들 데리고 처가를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러면 집에는 어머니 홀로 남게 되니, 노인네가 갑자기 혼자 쓸쓸하게 명절 다음날을 지내게 생겼다는 말이 나오자 어머니는 '감지덕지한 일'이라고 했다. 동생의 처가 방문이 기정사실화된 데서 오는 기쁨을 어머니는 그렇게 표현하신 것이었다.

그런데 동생은 설 다음날 처가에 가지 않았다. 내가 공주 처가에 갔다가 오후에 돌아오니 동생은 바다에 가 집에 없고, 어머니는 한탄하고 계셨다. 어머니는 동생뿐만 아니라 외가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두 아이에 대해서도 한탄을 하셨다. 특히 규빈이가 "외갓집에는 컴퓨터도 없고 텔레비전 38번이 나오지 않아서 싫어요"라고 한 말을 거듭 알리며 "컴퓨터와 텔레비전밖에 모르는 철딱서니 없는 년"이라는 표현을 하셨다.

동생은 설 연휴 다음날까지 쉰다고 했다. 그럼 설 연휴 다음날이라도 꼭 처가를 가라고 어머니는 타박에 가까운 강요를 했다. 딸, 사위, 아들, 며느리 모두 돌아가고 처가에 두 노인네만 남아 있을 테니 숫기 없는 데서 오는 부담이 적을 것 아니냐는 말도 하셨다. 동생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다음날(20일) 우리 가족은 서울을 갔다가 저녁에 돌아왔다. 딸아이가 대학 1년 시절의 기숙사 생활을 접고 서울 상도동의 큰 이모 집에서 살게 되어 미리 방 정리를 하는 일로 서울을 다녀온 것이었다.

그런데 동생은 그 날도 처가를 가지 않았다고 했다. 또 바다에 갔다가 늦게 돌아온 작은아들에게 저녁을 차려주며 어머니는 몹시 타박을 했노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큰아들과는 너무도 다른 작은아들의 이상한 성격에 거듭 한탄을 하셨다.

무엇보다도 사돈댁 어른들께 죄송한 일이었다. 사돈댁 어른들뿐만 아니라, 동생의 처남들과 처제들, 동서들 모두 한 마음으로 동생의 처가 방문을 기대하고 기다렸을 터였다. 더욱이 동생이 설 전에 처가를 방문하고 어른들께 큰 금액을 드리고 왔으니, 동생의 명절 처가 방문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는 일로 여겼을 터였다.

그런데 동생은 끝내 처가에 가지 않았다. 처가 어른들과 모든 붙이들의 기대를 냉혹하게 저버린 셈이었다. 생각할수록 안타깝고 섭섭한 일이었다. 알다가도 모를 동생의 마음을 정말 나로서는 헤아릴 길 없는 심정이었다.

최근의 낙상으로 몸의 고통을 겪으시는 어머니는 다음날(21일) 남산리 사돈댁으로 전화를 걸어 작은아들이 명절에도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의 처가에 가지 않은 일을 사죄하며 눈물을 지으셨다.

<4>

나는 오랜 망설임 끝에 이 글을 쓴다. 우리 가족의 사사로운 이야기일 뿐더러 낼 모레면 오십이 되는 동생의 이야기이니 사실은 부담이 크다. 하지만 나는 끝내 이 글을 쓰기로 했고, 웹상에 발표되는 이 글을 동생이 읽었으면 한다.

제수씨는 생전에 우스갯말로 내게 이런 얘기를 했다.

"아주버님은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무슨 일에나 앞장서기 좋아하시는데, 규왕 아빠는 너무 달라요. 정반대예요.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품을 아주버님이 다 차지하고 동생에게는 하나도 나누어주지 않으신 것 같아요."

정말 동생은 성격이 나와 너무 다르다. 대전에서 사는 막내 동생과도 많이 다르다. 동생은 일터의 동료들 외로는 교류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아예 가지를 않으려고 한다. 동생이 참여하는 모임은 놀랍게도 하나도 없다. 제수씨 장례 때도 동생 손님은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거기에 대한 '반성'도 없는 것 같다.

제수씨 생전에 가족 노래방 행사를 몇 번 가지면서 동생을 합류시키려고, 노래는 하지 않아도 좋으니 그냥 자리 지키며 구경이나 하라고 사정을 하며, 아이들까지 나서서 적극 권유와 설득을 했는데도 끝내 한 번도 성공을 하지 못했다.

광천 오서산과 청양 칠갑산을 다녀와서 덕산 온천에서 온 가족이 목욕을 할 때도 집에서 매일 목욕을 한다는 이유로 끝내 온천 목욕탕을 외면하고 혼자 차 안에서 잠을 잔 사람이었다. 그런 독특한 성격 때문에 제수씨가 많이 힘들어한 것을 본인도 잘 알고 있는 눈치다. 그래서 세상 떠난 아내에게 더 미안해 하는 것 같은데, 그 마음이 행동으로는 표현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동생은 세상을 보는 남다른 '눈'을 가졌다. 분명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정의감은 명확하고도 투철하다. 진실과 선과 옮음을 지향하는 가치관 쪽으로는 나와 전혀 괴리나 마찰을 빚지 않고 그야말로 의기투합한다.

동생은 예리하면서 논리 정연한 말을 하기도 한다. 일터에서 식사 때마다 성호를 긋는 등 천주교 신자임을 밝힌 관계로 다른 종교를 가진 동료와 종종 종교 논쟁도 하게 되는 모양이었다. 또 우리나라의 특수한 정치문제와 사회문제, 노무현 정권의 공과, 수구언론들의 속성과 관련하여 동료들과 논쟁을 하게 된다고 했다. 동생이 그 논쟁들의 내용을 소개할 때는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생은 그 정도의 지적 수준을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확실한 주관과 '중심'을 지니고 사는 셈이다. 그리고 동생은 용접 분야에 열 개가 넘는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고난도의 특수 용접 기술도 포함되어 있다. 작업장에서의 성실성과 책임감은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동생은 돈도 잘 번다. 일용직이기는 하지만, 일당이 높은 편인 데다가 여러 번 야근도 해서 지난 8월에는 00만원의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주변에서 동생에게 은근슬쩍 재혼 얘기를 하면 동생은 고개를 젓는다. 어떻게 세상 떠난 조강지처를 잊을 수 있느냐는 말도 하고, 성품이 좋지 않은 여자와 재혼을 잘못 하면 아이들 고생시키고 완전히 살림이 거덜 날 수 있다는 말로 '경계'를 표하기도 한다.

나는 동생을 보며 '중이 제 머리를 깎을 수 없다'는 속담을 떠올리곤 한다. 세상 떠난 제수씨에게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오십도 안 된 동생의 나이를 생각하면 재혼이 필요한 일로 생각된다. 아내는 시동생에게 "아이들은 내가 키워줄 수 있지만 삼촌 인생까지 내가 책임질 수는 없다"는 말로 확실한 뜻을 표하기도 한다.

동생은 재혼을 아직은 적극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고, 성격상 혼자 살 공산이 클 것도 같다. 나는 요즘 '중이 제 머리를 깎을 수 없다'는 생각을 거듭하며 일종의 '과제'를 안고 사는 기분이다. 실은 그 '과제' 때문에 이 글을 쓴 것 같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글이 길어졌다. 그 과제를 위한 고백이므로….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 세상의 뭇 선남선녀들께서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한다.  


  2007-02-28 12:12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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