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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월 4일 야곱의 우물- 루카 9, 28ㄴ-36/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7-03-04 조회수503 추천수5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루카 9,28ㄴ-36)

저는 산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설레입니다. 성경에도 좋은 의미로 쓰여진 산의 표상이 자주 등장합니다. 광야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준비하고 정화하는 장소라면,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특별한 장소입니다.

시편은 “북녘의 맨 끝 시온산은 대왕님의 도읍이라네. 하느님께서 그 궁궐 안에 계시며”(48,3ㄴ-4ㄴ)라고 노래하고 있고, 이사야는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2,2ㄴ) 하고,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시리라”(25,6)고 합니다. 그러기에 시편은 “산들을 향하여 내 눈을 드네”(121,1ㄱ) 하며 산을 향하여 주님의 도움을 기다립니다. 나아가 이사야는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2,3)고 합니다.

산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올라가야 할 곳이라고 외칩니다. 시편은 또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분의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24,3)고 합니다. 산은 공간적으로 볼 때 높으신 하느님을 제일 가까이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또한 깊고 신비롭고 고요하면서 변화하는 ‘靜中動’ 이미지 그 자체가 하느님의 속성을 품고 있습니다. 따라서 산은 예수님이 자주 산에서 기도하셨듯이 기도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도달해야 할 기도의 목적지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모세와 엘리야, 예수님도 그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세 분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유다인들이 최고의 지침으로 여기는 율법의 대변인인 모세와 예언자들의 대표인 엘리야와 함께 당신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예수님은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실 분이십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탈출시켜 해방시켰듯이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해 기득권 체제에 의한 억압에서, 나아가 죄의 종살이에서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을 탈출, 해방시켜 주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들이 희망을 두고 말한 바로 ‘그분’입니다.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져 있다가 깨어나 눈부시게 빛나는 예수님의 영광과 함께 있는 두 사람을 봅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의 분위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들은 세 분이 나눈 이야기의 내용은 듣지 못하고 예수님의 빛나는 영광만 봅니다. 수난 없는 영광만 누리고 싶은 그들의 영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9,35)는 말씀을 분명히 들었지만 알아들을 귀가 없었습니다. 수난에 대해서는 묻는 것조차 두려워하였을 뿐더러 서로 누가 제일 큰 사람이냐는 논쟁을 합니다.

또 예수께 받은 기득권을 공유할 마음이 없는 그들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못마땅해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의 냉대에 대해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라고 으스대다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께 꾸중을 듣습니다. 자신을 죽이고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제자의 삶이라는 것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 그들은 겟세마니 동산에서도 깊은 잠을 잡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눈길이 마주쳤을 때에 비로소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듯합니다. 베드로는 서간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에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4,12-­13). “사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줄 때, 교묘하게 꾸며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서 그리한 것입니다. 그분은 정녕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존귀한 영광의 하느님에게서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는 소리가 그분께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2베드 1,16-­18).

제자들과 초대교회 공동체는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지만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활약하다가 사도로서 첫 순교자가 되고, 요한은 가장 오래 살면서 제4복음서를 집필하여 우리에게 예수님에 대한 명상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산에서의 기억은 박해를 견디는 힘과 신자들을 격려하는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주님의 산에 오른 제자들이 된 것입니다.

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땀 흘리는 수고를 동반해야 합니다. 관광을 목적으로 온 사람들은 사찰 입구에서 북적대다가 떠납니다. 등산로 입구만 가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만나는 사람이 줄어듭니다. 숨도 차고 다리도 무거워지면서 도중하차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러나 다시 숨을 가다듬으며 한 발 한 발 걸어 정상에 이르렀을 때 느끼는 환희는 고생을 할수록 더 큰 것 같습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바람 한 점 없는 더위와 타는 목마름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길을 오르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묵묵한 인내의 걸음으로 산 정상에 이르렀을 때 하느님께서 차려주시는 잔치상을 받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얼마나 정상을 갈망하며 꾸준히 수행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산에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오르셨던 이 산을 우리도 갈망하며 오늘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야 하겠습니다.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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