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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톨릭 신학생들의 '착의식'을 보다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07-03-05 조회수617 추천수5 반대(0) 신고

             가톨릭 신학생들의 '착의식'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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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올해의 첫 '가족 나들이'를 했습니다. 아침 일찍 태극기부터 집 앞에 걸어놓고, 태극기 게양과 연관이 있을 듯싶은 흔쾌한 기분을 안고 오전 7시 30분쯤 집을 나섰습니다.

혼자 된 동생은 공휴일임에도 출근을 한 관계로, 또 중학생 조카 녀석은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는 이유로 가족 행사에 빠져 아쉬움을 주었지만, 한 달 넘게 낙상 후유증을 앓으시는 어머니는 불편한 몸으로도 기꺼이 함께 해주셔서 기쁨이 컸습니다.

충남 연기군 전의면에 있는 '대전가톨릭대학교'를 들르고, 공주와 논산을 경유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습니다. 즉 대전가톨릭대학교의 2007년도 '착의식·독서직·시종직 수여 미사'에 참석하고, 공주 계룡산 기슭의 한 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방학을 끝낸 딸아이를 공주 버스터미널에서 서울로 보내고, 아들 녀석을 논산 D고 기숙사에 데려다 주고 돌아오는 일정이었지요.


▲ 지난 1일 오전 10시 30분 대전가톨릭대학교 대성당에서 거행된 '착의식/독서직/시종직 수여 미사'의 한 장면  
ⓒ 지요하

오래 앉아 있으면 옆구리가 결리고 당기는 통증 때문에 불안해하면서도 어머니가 굳이 가족 나들이에 함께 하신 것은 두 가지 뜻이 있어서였습니다. 현재 우리 충남 태안 성당의 유일한 신학생인 홍헌표 베드로 학사의 '착의식'을 몸소 보시려는 뜻이었고, 손자 녀석이 생활하는 논산 D고의 기숙사 방을 직접 구경하시려는 뜻이었습니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위해 공주 계룡산 기슭의 한 음식점에서 송어회와 매운탕으로 저녁식사를 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지난 1월 10일 우리 부부의 20주년 결혼기념일에 계룡산 기슭에서 사는 아내의 공주사대부고 동기 정영진 화백과 함께 저녁식사를 한 집인데, 그때 처음 먹어본 송어회와 매운탕이 내 입에는 갯물 생선보다 더 맛이 좋더군요. 그 후 아이들과 함께(토막방학을 맞은 아들 녀석을 집에 데려올 때) 또 한번 그 집을 들렀는데, 아이들도 송어회와 매운탕이 맛있다며 잘 먹더군요.

1Kg에 1만8000원이니 갯물 양식 생선보다도 훨씬 싼값이었습니다. 값싸고 맛좋은 송어 음식을 어머니도 맛보시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장거리 운행임에도 승합차의 넉넉한 좌석 덕을 보시며 별로 어려워하지 않으셨고, 송어회와 매운탕도 맛있게 잘 드셔서 나로서는 고마운 마음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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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노모께서 홍헌표 베드로 신학생의 착의식을 보시려는 것은 우리 본당의 유일한 신학생을 아끼시려는 뜻이기도 할 터였습니다. 어머니는 옛날부터 본당 신학생들에게 유난하실 정도로 신경을 써왔습니다. 신학생들이 대축일이나 명절 때 본당에 오면 어머니는 꼭꼭 10만원씩, 5만원씩 용돈을 주시곤 했습니다.

지금도 살림을 관장하시는 어머니는 당신이 관리하는 생활비를 여투고, 자녀들이 드리는 용돈을 잘 아껴서 이런저런 뜻있는 일에 쓰시면서, 신학생들에게도 적은 금액이나마 용돈을 주시곤 한 거지요.

우리 본당 출신 두 번째 사제이신 방영훈 도미니꼬 사비오(2003년 서품·제주교구 파견 사목을 거쳐 현재 미국 시애틀에서 교포 사목 중) 신부님도 신학생 시절에 내 어머니 덕을 많이 보아서인지 어쩌다 출신 본당에 오시게 되면 꼭 최오채 안나 할머니를 찾으시곤 하지요.


▲ 대성당 안에 입장하지 못한 신자들은 대성당 밖에 설치한 대형 모니터를 보며 미사를 지내고... 맨 앞의 노인이 내 어머니다.  
ⓒ 지요하

그런데 어머니의 그런 공은 현재까지는 단 한 번 성공을 거두었을 뿐입니다. 어머니가 전에 용돈을 주신 신학생들 중에 사제가 되신 이는 단 한 분뿐이니 말입니다. 방영훈 신부님보다 앞서 우리 본당 출신 2호 사제가 되실 줄 알았던 이가 부제품까지 받은 상태에서 그만 옷을 벗은 바람에 누구보다도 어머니의 낙심이 컸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안타깝고 가슴 아픕니다. 신학교 공부 7년에 군대 생활 3년, 도합 10년의 공을 쌓고 마침내 사제품에 오르기 직전 마음의 동요를 이기지 못하고 옷을 벗었으니, 본인의 부모와 가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신앙공동체 모든 형제자매들의 상심과 허탈감은 정말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천주교 신자라면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신앙공동체가 사제 한 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들이는 공은 대단히 큽니다. 사제 탄생은 곧바로 출신 본당의 영광을 표징 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사제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본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신앙공동체의 끊임없는 관심과 기도, 정성 어린 노력도 매우 중요하지요.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데다가 몇 년 전의 쓰라린 '실패'와 아픔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어머니는 그래서도 더욱 신학생에게 마음을 쓰십니다. 신학생을 위한 기도를 하루도 거르지 않으시고….

지난 2004년 본당 설립 40주년을 지내고, 공소 시절까지 합해 어언 51년의 연륜을 헤아리는 우리 태안 본당은 아쉽게도 사제는 두 명밖에 배출하지 못했습니다. 50년이 넘는 연륜을 가진 본당이 고작 두 명의 사제를 배출했다는 것은 정말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의 홍헌표 신학생 앞에 또 한 명의 신학생이 있었습니다. 부제품을 받을 단계까지 간 신학생이었지요. 우리 본당 출신 세 번째 사제가 곧 탄생하려나 했더니,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 부친의 경제 문제가 덫이 되어 그만 신학교를 떠나고 말았지요. 그 일 역시 생각하면 너무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 또 한 가지 안타까운 과거 사연 때문에 어머니는 더욱 조바심을 갖고 긴장하며 간절히 기원하는 마음으로 홍헌표 신학생을 바라보시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공익 근무'로 병역 의무를 완수하고, 1년 동안 캐나다 유학을 하고 돌아온 홍 신학생이 신학교 4학년에 복학하여 착의식을 갖게 되자, 어머니는 그 착의식 자리에서 기도를 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홍 신학생의 '착의'를 축하는 자리에서 홍 신학생이 앞으로도 변함없이 올곧게, 옹골차게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서 마침내 사제품에 오르기를 기원하시려는 뜻으로 어머니는 불편한 몸을 무릅쓰고 가족과 함께 먼 길 출타를 하신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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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사 후 교구장 주교님과 총장 신부님을 비롯한 교수 신부님들과 기념 촬영을 한 신학생들. 뒷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우리 태안 본당 출신 홍헌표 베드로 신학생  
ⓒ 지요하

홍 신학생의 착의식을 보기 위해 우리 태안 본당에서는 두 분 수녀님과 사목회장을 비롯한 30여 명의 형제자매들이 대전가톨릭대학교엘 갔습니다. 대전가톨릭대학교 대성당이 비좁을 것을 예상하고, 미리 자리를 잡으려고 홍 신학생의 가족과 태안 성당 신자들은 아침 6시 30분에 성당 버스로 출발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우리 성당 교우들이 우리 가족 자리까지 잡아놓을 것으로 믿고 오전 7시 30분에 출발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 이미 다른 성당 신자들이 거의 자리를 잡고 앉아 있어서 우리 성당 신자들은 대부분 서서 미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아예 대성당에 입장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별 수 없이 대성당 밖의 대형 모니터 앞에서 미사를 지냈습니다. 성당 밖에서 모니터를 통해 제대를 보며 미사를 지내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래도 경건하고도 간절한 마음으로 열심히 전례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대전가톨릭대학교뿐만 아니라 서울의 가톨릭대학교에서도 3월 1일 '착의식·독서직·시종직 수여 미사'가 거행된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날 전국의 모든(인천·수원·대구·광주·부산·목포) 가톨릭대학교에서 일제히 같은 행사가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전가톨릭대학교는 개교 이래 가장 많은 91명이 착의식과 독서직·시종직 수여식에 참여한다고 했습니다. 착의식은 4학년(35명) 때 하고, 독서직은 5학년(24명) 때 수여 받고, 시종직은 6학년(32명) 때 수여 받는다고 했습니다. 대전가톨릭대학교는 주로 대전교구와 청주교구 사제들을 배출하는데, 독서직을 수여 받는 5학년 24명 중에는 수도회 소속의 흑인도 한 명 있었습니다.

이번에 우리 태안 본당의 홍헌표 신학생도 함께 한 착의식(着衣式)이란 사제직을 지원한 신학생들이 '수단'과 전례 거행 및 성사 집행 중에 착용하는 '중백의(中白衣)'를 받아 입는 예식의 이름이지요.


▲ 홍헌표 신학생의 '착의'를 축하하는 태안 성당 신자들  
ⓒ 지요하

수단은 '진리와 정의의 갑옷'을 상징하는 천주교 성직자의 고유 복장으로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옷이기도 합니다. 이 수단을 입음으로써 성령의 은총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마음을 변함없이 보존하고, 세속의 장애들을 극복하며, 현세의 욕망을 이기게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천주교 성직자들은 수단을 입음으로써 세상에 대하여 자신을 죽이고(육신을 버리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며, 교회에 자신을 진리의 증거자로 바치고, 백성에게 사랑의 봉사자로 살 것을 다짐하게 됩니다.

수단은 6세기경부터 생겨난 것이지만 (남녀 수도자들에게 수도복을 입혀주는 '착복식'은 3세기경부터 시작되었고), 독서직과 시종직 수여는 3세기경 초대 교회 때부터 이어져 온 것이라고 합니다. 가톨릭 교회 2천 년의 역사 속에서 발전과 변모를 거쳐 오늘날의 형태로 존속되고 있는 거지요.

독서직은 전례 때 복음을 제외한 성경을 읽고 노래를 부르고 말씀을 전하는 권한을 의미하는 것이고, 시종직은 역시 전례 때 제대에 촛불을 켜고 종을 치고 성구(聖具)들을 옮기고 성체를 분배하는 등의 봉사를 의미하는 것인데, 오늘날에는 모두 일반 평신도들에게도 부여되고 있는 직책이지요.

신학생들의 '착의식·독서직·시종직 수여' 행사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맨 처음 단계인 '착의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신학생이 되고, 일반 대학으로 치면 졸업학년인 4학년이 되면서 진리와 정의의 갑옷을 상징하며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수단을 처음으로 받아 입는 의식이니, 어떤 비장함이라든가 설레는 마음이 가장 강할 듯도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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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가 끝나고, 대성당 밖 마당에서 교구장 주교님과 총장 신부님을 비롯한 교수 신부님 전원이 함께 하는 기념촬영이 끝난 다음, 신학생들은 각자 출신 본당 신자들에게로 가서 축하를 받았습니다.

홍헌표 신학생은 축하 꽃다발을 안고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특히 내 어머니를 무척이나 반가워했습니다. "몸도 불편하신 노인께 먼길을 오시게 해서 죄송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오늘 대전가톨릭대학교를 찾은 수천 명중에서 가장 연세가 많으신 분일지도 모른다"며, "그러니 제가 가장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일 겁니다"라는 말도….


▲ 우리 가족 모두도 홍헌표 신학생의 '착의'를 기뻐하며 축하했다.  
ⓒ 지요하

그리고 홍헌표 신학생은 내 아들 녀석에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내 뒤를 이어야지!"

이 말에 내 아들 녀석은 빙긋이 웃기만 했고…. 내가 가족을 데리고 홍헌표 신학생의 착의식에 참석한 이유 중에는 내 아들 녀석에게 뭔가 '자극'을 주기 위한 뜻도 있는데….

우리 일행 중에는 대전에서 오신 우리 본당 11대 주임이셨던 김종기 세자 요한 신부님도 있었습니다. 현재 교구청에 계시는 김종기 신부님은 홍 신학생을 신학교에 보내신 분이니, 장차 홍 신학생의 '아버지 신부님'이 되실 분이었습니다. 천주교 사제들은 자신을 신학교에 보내주신 신부님을 '아버지 신부님'으로 부르지요.

우리 일행은 근처 음식점으로 가서 즐겁게 점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이 먼저 일행과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가족 모두가 함께 움직이는 것을 일행들 모두 부러운 눈으로 보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모로는 자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 잠시뿐, 언젠가는 우리 가족도 뿔뿔이 헤어져 살 터였습니다. 또 언젠가는 사별의 아픔도 겪게 될 테고…. 그리하여 우리 모두 티끌세상의 티끌 같은 존재임을 되새기게 될 테고….

공주로 가는 차 안에서 딸아이와 아들 녀석에게 물었습니다.

"아빠가 가족 모두에게 홍 학사의 착의식을 보게 한 이유를 알겠지?"

아이들은 그 이유를 잘 알면서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닐 터이므로….  


  2007-03-05 15:06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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