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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스스로 모세의 자리에 앉는 자들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3-06 조회수574 추천수7 반대(0) 신고

 

<스스로 모세의 자리에 앉는 자들> - 윤경재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마태 23,1-12)



  인간은 자기가 지니고 있는 본능적 충동에 깜짝 놀란다고 합니다. 그 본능적 충동은 강한 힘을 지니고 있어, 애정이나 증오, 식욕이나 성욕, 권력욕으로 세상을 정복하거나 지배하려고 합니다. 이런 본능적 충동에 놀란 개인은 이런 사실을 인정하려들지 않고 외면하고 숨겨두려는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자신 안에 지킬박사와 하이드와 같은 이중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에 놀라면서 본능적 측면을 억압하려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철저하게 억압하려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대부분은 자기의 본능충동을 통제할 수 있는 규칙 체계를 만들어 두게 됩니다. 이 규칙에다 자신이나 타인이 범할 수 없는 가치를 부여하고 절대시하려 듭니다. 이 규칙의 통제 속에 스스로를 억압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사람은 이 규칙을 어기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래야 힘이 있다고 여기게 됩니다.


  이런 심리적 모습이 사회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리사이운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조상들이 과거에 겪은 바빌론 유배를 반성하며, 하느님의 계명을 올바로 실천하지 못한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올바로 이끌어 줄 많은 규칙들을 제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규칙들을 또 재해석합니다. 예를 들면 소박에 관한 율법을 힐렐이니 샴마이니 하는 학자들 나름으로 재해석을 하여 나름대로 세세한 실천요강을 정합니다. 심지어 힐렐학파는 부인에게 남편이 무엇인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이혼할 자격이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그 심리적 근저에는 자신들의 편리를 위함입니다. 자기들 입맛대로 처를 소박하기 위한 근거를 세운데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행동들은 그저 자신들 안에 가지고 있는 죄의식을 회피하려는 기만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기만으로는 인간 안에 존재하는 무의식이란 강력한 힘을 돌릴 수 는 없습니다. 자기 자신은 어느 정도 훌륭하고 신중한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가족 안에서, 사회와 국가 안에서 해독을 끼치는 사람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위 속 다르고 겉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인류역사에 나오는 모든 정치, 종교적 권력에 빠진 사람들이 이런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먼저 자신 안에 있는 선과 악이라는 본능 충동이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식욕, 성욕, 권력욕, 명예욕 등의 생존본능을 억압하려고 들 것만이 아니라 이 힘을 창조적인 데로 방향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기준이 하느님의 사랑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와 스승이 하느님과 예수님이 되어야지 자기가 정해놓은 규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도 지키지도 못할 것을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자신과 모든 사람을 억압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하여야 합니다.


  아프리카 오지에 한 선교사가 길을 나섰습니다. 한참을 가다가 안내자로 나섰던 두 사람이 커다란 돌멩이를 어깨에 들러 메고 길을 걸었습니다. 그 선교사는 왜 그렇게 무거운 돌멩이를 지고 가는 지 의아해 하면서도 그들을 무시했기 때문에 묻거나 따라 하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낑낑 메고 걷느냐고 힘겨워하는 그들이 안쓰러웠습니다. 공연한 짓을 하는 그들이 바보 같아 보였습니다. 한 낮의 무더위에 무거운 돌을 버리고 편히 걷지 않는 그들이 우스워졌습니다.

  얼마를 걷다보니 조그만 강이 나타났습니다. 폭은 넓지 않고, 깊지 않으나 물살이 얼마나 빠른지 제대로 걸음을 뗄 수 없었습니다. 헤엄치기에도 적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돌을 지고 간 원주민들은 그 돌 무게만큼 균형을 잡으며 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제야 그 선교사는 그들이 돌을 지고 온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곧 그는 자신의 경솔함을 자책하며 먼 길을 되돌아가서 그들처럼 낑낑 매며 커다란 돌을 들고 온 후에야 그 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버리고 싶어 하는 모든 인간적 약점과 수고로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아갈 때 유혹이라는 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게 됩니다.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처럼 기만하고 위선을 보일 때 유혹에 더 잘 넘어가게 됩니다. 남보다 똑똑하고 힘이 있다고 자만할 때  인생의 곤란이라는 강을 제대로 건너기가 더 어려운 것입니다. 혹 그 강을 건넜다 하더라도 물살에 휩쓸려 목표 지점과는 동떨어진 곳에 도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녀야 할 기준을 우리에게 세워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기준을 두고 그 본래 정신에 합당한지 새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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