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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직자의 길, 스스로 일찍 포기하지 않기를..."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07-03-07 조회수783 추천수8 반대(0) 신고

              "성직자의 길, 스스로 일찍 포기하지 않기를..." 
               아들 녀석에게 아버지의 소망을 확실하게 말하다 
      

 





▲ 지난해 여름방학 때 부여읍 '궁남지'에서 부자가 함께  
ⓒ 지요하



<1>

언젠가 잠자리에서 또 한 번 아내에게 등을 돌려대고 긁어달라고 했다. 아내에게 등을 긁어달라는 것이야 노상 있는 일이었다. 더러는 내가 마누라의 펑퍼짐한 등을 긁어주는 경우도 있고….

"내 그럴 줄 알었지. 오늘은 그냥 넘어가시나 했더니…."

아내는 군소리 한마디하며 내 내의를 걷어올리고 등을 긁어주기 시작했다.

"으이그, 시원허다. 마누라가 등 긁어주는 재미루 산다는 말두 맞는 말이라니께. 내가 직접 '효자손'으루 긁는 것보다 마누라가 손톱으루 긁어주는 게 몇 배는 더 시원허구 촉감두 좋으니, 이것두 묘헌 조화여."

나는 싱거운 소리를 하며 등의 쾌감을 즐기다가 돌연 무엇에 놀란 듯 벌떡 몸을 일으켰다.

"왜 그래요, 갑자기? 아직 다 긁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이상헌 생각이 들어서 그려."
"또 뭔 생각이요?"
"우리 아들을 신부님 맨들 맘을 갖구 사는 사람이 이래두 되는 걸까?"
"그건 또 뭔 소리래요?"
"저렇게 둔감허긴…. 우리 아들이 사제가 되면 평생을 혼자 살어야 되는디, 그걸 바라는 애비가 이렇게 노상 마누라헌티 등 긁어달라구 허면, 그것두 이상허구 미안헌 일 아녀? 안 그려?"

아내는 이불 속에서 쿡쿡 웃었다. 그러다가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생각헤 보니께 그것두 그러네요. 허지만 당신이 그런다구 헤서 우리 아들이 신학교에 갈 가능성이 커지는 것두 아니니께 그냥 얼릉 누워요."
"아녀. 우리 아들이 신학교에 가기를 진심으루 바란다면, 내가 마누라헌티 밤마다 등 긁어달라구 허는 것두 자제를 허구 살어야 혀."
"그럼, 그렇게 허세요. 나만 편허지 뭐."

"그런디 말여, 우리 아들의 성소(聖召) 지향에 도움만 된다면 내가 무슨 짓두 다허구, 또 조심조심 자제와 극기를 허면서 살 텐디, 녀석이 아직은 신학교에 갈 생각이 읎는 것 같어."
"너무 조바심허지 말아요. 이제 고등학교 1학년이니께, 성소 작용이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 있어요."
"그 가능성을 생각허구 내가 이러는 겨, 지금."
"그런 건 우리 아들이 신학교에 간 후에 생각헤두 늦지 않구, 또 그때 가서야 필요헌 일이니께요, 너무 조바심허지 말구 얼릉 누워요."
"그럴라나…? 그려, 그럼. 등을 긁다 말어 갖구, 꼭 밥 먹구 나서 양치 안헌 기분이니께, 등두 마저 긁어야지, 뭐."

나는 다시 슬그머니 누웠다. 아내는 이내 다시 내 등을 긁어주었지만, 우리 사이에는 이상한 침묵이 흘렀고, 내 등은 조금 전처럼 별로 시원하지가 않았다. 괜히 무거워지기만 하는 마음이었다.

<2>

나는 나이 40에 결혼하여 딸아이와 아들 녀석을 얻었다. 아이들 키우는 재미로 살았다. 그 재미있던 세월이 꿈결같이 흐르더니 어느새 딸아이는 대학생이 되고 아들 녀석은 고등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두 녀석 모두 금세 2학년이 되었다. 잠시 후면 3학년이 되고 4학년이 되고, 또 잠시 후면 부모 둥지를 떠나게 될 것이다.

금세 흐르고 금세 변모하는 세월 속에서 어느 계기로든 인생은 '찰라'라는 사실, 잠시 동안의 '순례'일 뿐이라는 '허무의 질감'도 얻게 될 것이다.

녀석들은 지금 서울과 논산에서 학교생활을 하니, 지금도 거지반 부모 둥지를 떠나 사는 셈이다. 내가 아들 녀석을 꽤 먼 동네인 논산의 D고에 보낸 데에는 두어 가지 특별한 까닭이 있다. 그 까닭들을 아들 녀석도 잘 주지하고 있다.

녀석이 중학교 1학년 시절, 견진성사를 주러 봄에 우리 태안 성당을 방문하신 교구장 경갑룡 요셉 주교님께서 중학생이 된 내 아들 녀석을 보시더니 "고등학교는 논산 00고로 보내"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을 옆에서 아들 녀석도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논산 D고를 늘 염두에 두었고, 아들 녀석도 자신이 논산 D고로 진학하는 것으로 알았다. 나는 주교님 말씀이 최초 계기가 되어 아들 녀석이 논산 D고에 진학했다는 사실, 그것의 '사실화'가 녀석의 인식 안에 잘 머무르게 되는 것도 좋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아울러 그것이 어떤 좋은 작용으로 연결되기를 희망했다.

논산 D고는 전국에서 인성교육 프로그램과 실적이 가장 우수한 학교로 교육인적자원부에서 인정한 학교다. 그런 이유로 매스컴에도 많이 소개가 되었다. 서울과 부산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유학을 온 학생들도 많다.

그런 점도 마음에 들었지만, 논산 D고는 천주교 학교로서 현 대전교구장 유흥식 라자로 주교님을 비롯하여 10여 명의 성직자를 배출한(단일 고교로서는 대전·충남에서 성직자 배출을 가장 많이 한) 학교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아들 녀석을 그 학교로 보내면 알게 모르게 '성소 작용'이 좀 더 원활하리라는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중학교 때 성적이 꽤 우수한 편인 녀석을 논산 D고로 진학시키는 데에는 다소의 애로가 있었다. 중3 시절의 담임 선생님은 녀석을 내 모교인 고장의 학교로 진학시키고 싶어했고, 논산 D고보다 좀 더 명문으로 인정받는 공주사대부고 진학을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논산 D고를 고집했고, 그 이유를 설명하는 중에 '성소 작용'에 대한 기대를 표현했다. 아들을 천주교 사제로 만들고 싶은 희망을 분명히 표현한 것이다. 그러자 종교를 갖지 않은 담임 선생님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실망과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3>

아무튼 내 아들 녀석은 자신이 논산 D고로 진학하게 된 사정과 아버지의 희망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아들 녀석은 현재로서는 신학교에 갈 마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부모의 확실한 희망이 녀석에게 조금은 부담이 되는 것도 같은데, 그 부담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낌새다.

유치원 시절부터 부모를 따라 주일 미사는 물론이고 평일 미사도 거의 빠짐없이 참례하면서 열심히 하느님을 접하고 배우며 자란 아이다. 저녁 먹고 텔레비전 만화영화에 열중하다가도 미사에 가자면 지체 없이 일어설 정도로, 가족과 함께 성당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초3 시절 첫 영성체를 한 후 중3 시절까지 미사복사 봉사도 충실히 했고, 중학생 시절에는 평일 미사 오르간 반주 봉사도 많이 했다. 또 중2 시절부터 스스로 기타를 배우더니, 본당 학생 음악제마다 기타를 맡고, 지금 논산 D고의 교내 미사에서도 기타 반주를 한다.

녀석은 중학생 시절 중반까지는 장차 신부님이 될 뜻을 분명히 했다. 신부님이 제의실에서 제의를 입으며, "우리 함께 열심히 미사를 지내고, 우리 헨리꼬가 장래 좋은 신부님이 되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자" 하셨을 때 "네"하고 명확하게 대답했노라는 말도 해서 가족들을 기쁘게 했다.

그런데 녀석은 차차 마음이 변하기 시작했다. 중2 시절 예쁘게 생긴 처녀 담임 선생님이 녀석에게 "너는 얼굴도 잘생기고, 키도 크고, 공부도 잘하고, 몸도 건강하고, 성품도 좋으니, 갖출 것을 다 갖추었다"면서 "너는 장래 인기 있는 멋진 사람이 될 거야"라고 칭찬하셨다는 말을 집에 와서 전할 때, 나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상한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녀석은 천주교 사제들의 로만 칼라가 '독신 정결'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또 신부님의 수단이 '육신의 죽음·세속을 버림'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두려움을 갖는 것 같았다.

녀석은 "평생을 독신으로 산다는 것이 너무 어려울 것 같아요, 혼자 살 자신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아요"라고 이렇게 녀석은 고민스러운 심중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신부님들은 절대로 혼자 사시는 게 아니야. 하느님과 함께 사시는 거야.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을 바라고 사시기 때문에 결코 외롭지 않아. 인간적인 외로움들을 능히 이길 수 있는 힘을 하느님께서 주시거든. 하느님께만 의지하면 돼."

이런 얘기를 들려주면서 한편으로는 차라리 아들 녀석이 좀 더 깊은 '고민의 수렁'을 갖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고민의 수렁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 수렁을 박차고 나올 수 있는 힘도 커질 수 있을 것이었다.

<4>

지금 대전교구청에 계시는 김종기 세자 요한 신부님이 제11대 주임으로 우리 본당에 계실 때였다. 어느 주일의 교중 미사 때 강론을 하시면서 사제 지망 시절의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셨다.

"고교 졸업 후 일 년 동안 쉬면서 인생 진로 문제를 놓고 고민하다가 신학교에 갈 결심을 하게 됐지요. 신학교에 갈 결심을 하고 나니까 갑자기 눈물이 나대요.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급기야는 온 방안을 헤매면서 대성통곡을 했어요."

신부님은 웃으면서 그런 말을 했지만 신자들은 이곳저곳에서 눈물을 닦았다. 나도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 본당 출신 두 번째 사제인 방영훈 도미니꼬 사비오 신부님이 부제 시절에 부제 수품 인사를 하러 와서 김종기 신부님을 도와 미사를 지낼 때였다.

"방 부제 인사드립니다. 훗날 사제가 되더라도 평생 동안 변함없이 '방부제'로 살겠습니다. 아무튼 여러 어른님들과 형제자매님들 덕분에 제가 무사히 방부제가 되었습니다."

'방 부제(方副祭)'를 '방부제(防腐劑)'로 표현하여 잠시 작은 웃음이 인 순간, 김종기 신부님이 별안간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실은 신세 조진 건데."

순간 큰 폭소가 온 성당 안을 뒤덮었다. 그 폭소 속에서도 나는 가슴을 치는 이상한 아픔에 눈을 닦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미사 복사를 한 초등학생 아들 녀석도 함께 웃었는데, 그날의 그 웃음을 아들 녀석이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기억하고 있다면, 폭소를 유발한 김 신부님의 그 말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괜히 궁금해지는 마음이다.)

방 신부님은 사제 서품 후 출신 본당에 와서 '첫 미사'를 지낼 때 한 번도 울지 않았다. 미사 후 축하식 자리에서 인사말을 할 때도 "신학생 때 돌아가신 어머니 덕분에 미리 실컷 울어서 오늘 이 자리에서는 울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라며 정말 울지 않았지만, 대신 눈물을 닦는 자매들이 많았다.

그런데 우리 본당 출신 1호 사제이신 김한승 라파엘(대전가톨릭대학교 종교음악학부 교수) 신부님은 첫 미사를 지내며 영성체 전 '평화의 인사' 시간에 신자 석으로 내려와 가족들과 악수를 하며 눈물을 흘려서 온 성당 안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5>

아들 녀석을 논산 D고로 진학시킨 탓에 내 고생이 큰 편이다. 2시간도 더 걸리는 길을 종종 간다. 태안에서는 직행버스도 없으려니와, 여러 곳을 경유하는 버스를 이용하니 다섯 시간 이상이 소요된다. 버스 타는 고생이 너무 안쓰러워 내 차로 외박 날이나 방학 때 데려오고 데려다 주는 일을 거듭한다.

물론 고생스럽기야 하지만 2시간 이상 아들 녀석과 동승하며 함께 하는 시간이 참 즐겁다. 아들 녀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귀한 시간이기도 하다. 어쩌면 아들 녀석이 훗날 아버지를 가장 잘 기억할 수 있는 일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녀석은 논산에서 오면서 언젠가는 자기 반 아이들 거의 모두가 아빠 책들을 읽어서 아빠 팬이 되었다는 기분 좋은 말을 들려주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지난 2월 3일 밤에는 집에서 아들 녀석과 진지한 대화 시간을 가졌다. 서울 '소피텔 앰버서더 호텔'에서 거행된 소설가 정건영 선배의 자혼(子婚)에 참석하고 온 날 밤이었다. 성당에서 '학생음악제' 연습을 하고 밤 11시가 다 되어 집에 온 아들 녀석과 와인을 한잔 나누며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아내와 딸아이도 합석하여 가족회의 같은 형국이 되었다.

아들 녀석은 논산 D고에서도 전체 학년의 상위 그룹에 들 만큼 공부를 잘하는 편이다. 장학금도 타서, 나는 그 장학금을 가지고 별도로(아들 이름으로) 십일조 헌금을 기분 좋게 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 2학년이 된 아들 녀석은 신학교에 갈 뜻이 없다고 했다. 일반 명문대 진학 의지를 거듭 표명했다. 이미 그 의지를 일방적으로 억압할 수는 없는 단계였다.

하지만 나는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소망을 다시 한번 확실하게 표명했다. 젊은 시절에 세상의 허무를 일찌감치 체득한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찰라 같은 인생에 연연해서 살기보다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추구하며 하느님의 사제로 수많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봉사하는 삶이 얼마나 가치 있고 숭고한 것인지를 설명했다.

하느님의 존재를 배제하거나 부정하고서는 우주 만물의 존재 이유를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사실, 하느님의 존재와 연관지을 때만 세상의 존재에 대한 설명이 비로소 가능해지는 그 명백한 진리를 절대로, 한시도 외면하지 않기를 소망했다.

"지금은 너희들이 사제 성소와 수도 성소에 대해 확고한 생각을 갖지 못하더라도, 앞으로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인생에 대한 시야가 점점 확대되면 하느님의 부르심을 확실하게 인식하게 될지도 몰라.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몸의 정결 상태가 유지되어야 해. 하느님의 부르심이 없어 훗날 결혼을 하게 되더라도, 결혼을 하는 그 순간까지 몸의 정결 상태를 유지해야 해.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 수도자들의 독신 정결은 참으로 교회를 거룩하게 만들고, 교회의 거룩함을 유지시키는 최고 덕목이야. 지금은 마음이 확실하게 서지 않더라도 언제 불시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접하게 될지 모르니, 그때를 대비해서 늘 몸의 정결 상태를 유지해야 해."

아이들은 아빠의 말을 진지하게 들었다. 아들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나는 아이들의 그런 진지한 태도만으로도 희망과 기쁨을 얻는 듯했다.

"신부님들 중에는 서울대를 나오고 명문 고교 교사를 하시다가 신학교를 가신 분도 계시고, 의과대학을 다니시다가 사람의 육신을 치유하는 의사보다는 영혼을 치유하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의학 공부를 접고 신학교로 가신 분도 계셔. 그분들의 경우를 놓고 보면 일반 대학에 다니다가도, 또 사회생활을 하다가도 신학교로 갈 수 있는 시간과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몸의 정결을 지켜야 돼. 아빠가 오늘은 너희들에게 성직자 수도자의 길을 강요하지 않겠지만, 스스로 일찍 포기하지도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몸의 정결은 꼭 최후의 순간까지 유지하고 살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딸아이와 아들 녀석과 함께 와인 잔을 들었다. 술을 전혀 못하는 아내도 잔에 주스를 붓고 함께 건배를 했다. 나는 와인을 기분 좋게 마시며, 2월 3일의 이 시간을 오래 기억하기로 마음먹었다.  


  2007-03-07 14:34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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