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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40) 부자 되세요! (펌)
작성자유정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7-03-08 조회수587 추천수4 반대(0) 신고

 

 

 


              부자 되세요!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대신에 “부자 되세요!”, 혹은 “돈벼락 맞으세요!”라는 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복음(루가 16, 19- 31)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부자와 거지 나자로의 비유를 들려주시며, 참으로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 나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계십니다.(마태 19, 24 참조)  우리는 되기도 어려운 지상의 부자가 되어 천국을 어렵게 가는 것보다 비록 그런 부자는 못되더라도 작은 것에 만족하며 이웃에게 사랑과 자선을 실천하는 마음의 부자가 되어 쉽게 천국에 가면 어떨런지요? 참고로 임덕래님이 올린 백 힐라리오신부님의 강론을 퍼드립니다. 


               <거지에게 구걸하는 부자가 있을 것이다>


  부자가 된 사람들을 보면 나름대로 엄청난 노력과 각고의 희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재벌이 된 사람들의 프로필을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대체로 그들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아주 가난한 가정의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내고 나서 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고 재산을 축적하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한다. 물론 부모를 잘 만나서 힘들이지 않고 유산을 물려받아 부자인 채로 있는 사람도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자기 관리를 뛰어나게 잘 한다는 점이다.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아끼고 소중히 여기며 함부로 쓰지 않는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이나 단체를 도와줄 때는 아낌없이 너그러워 진다. 이른바 졸부들이 흥청망청 쓰는 것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버는 것보다 쓰는 게 더 어렵다는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는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미대륙 전역에 병원이나 사회복지 재단을 설립하고 희사하였다.

  그러나 ‘대개 부자라고 하면 인색하고,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부를 좀 더 늘릴까 고민하며 다른 이의 것을 빼앗아 1개를 마저 채워 100개를 만족하는 사람들이다’라는 인상을 갖는다. 돈의 힘으로 인력을 살 수는 있어도 인격을 살 수는 없다. 돈많은 사람들이 돈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이미 돈의 노예가 된 저속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 돈이 많다고 남을 업신여긴다면 돈이 다 떨어졌을 때 개만도 못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사람보다 돈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나자로는 부자의 문지방에서 상 밑으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며 온 몸에 난 종기를 개가 핥는 것을 바라만 보는 거렁뱅이이지만, 죽어서 아브라함 할아버지의 품에 안긴다. 그러나 부자는 그 자신이 그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불쌍한 마음과 자비를 베풀지 못하여 유황불이 타는 연옥에서 물 한모금을 구걸하는 가련한 신세가 된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의 살아 있는 5형제를 구하기 위해 아브라함 품에 안겨 있는 나자로를 보내어 이 사실을 알리려 하나, ‘예언자의 말을 못 믿는 사람에게 누군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해도 그들은 믿지 못할 것이다‘하며 아브라함 할아버지는 거절한다. 그래도 그 부자는 조그만 양심이라도 있다. 털끝만큼이라도 사랑이나 자비가 없다면 세상을 저주하고 자신을 학대하며, 결코 남은 형제들을 구원하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았으리라. 그런 면에서 그 부자는 지옥이 아닌 연옥에서 모진 단련을 받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 이라고 떠들어대는 이분법적 개신교들을 보면 이 연옥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희망이 서려 있는지 가슴이 벅차오른다. 아무리 잘 살았다고 하더라도 천국에 자신있게 간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며, 주 하느님을 모른다고 지옥에 떨어진다면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일까! 지극히 높으신 분의 심판 방식은 사뭇 다르다. 늦게 일하러 온 사람이나, 큰 죄를 저질렀어도 뉘우치는 사람에게 똑같이 은총을 내려주신다.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에게 이 얼마나 다행스런 자비심인가!

  성서는 부자에게는 이름이 없지만 가난한 거렁뱅이에게는 ‘나자로’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존재의 확신이고 인격의 인정이다.

이름값을 하여 명성을 날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어떻게 이름을 남길 것인가?

  카네기는 그의 저서에서 ‘부에 대하여 하느님으로 부터 위임받은 신성한 것’이라는 신조아래 사회에 거액의 재산을 기부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교회는 부자들이 이끌어가고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까?”라고 질문을 한다면 ‘아니다!’라고 대답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가 않은 까닭이다.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고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은 결코 부자들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나보다 못한 이에게 나누고자 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교회의 흐름은 이 가난한 사람들에 의해서 움직이며 그들을 위해서 존재한다. 조그만 것이라도 나눌 때, 부자가 불속에서 한모금의 물을 원했던 것처럼 그것이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임을 절실히 느낄 수가 있다.

 

“거지한테 구걸할 부자가 있을 것이다!”

 

  이는 부자들한테 울리는 무서운 경종의 소리이며, 나누지 못하는 우리의 보통 사람에게 주는 경고의 메시지이다. 

 

                                              < 이현철님의 글에서 발췌>

출처 : 우리들의 묵상

게시번호 : 9603

게시일자 : 2005년 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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