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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숨은 곳을 모르겠나이다
작성자최금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7-03-09 조회수690 추천수0 반대(0) 신고

숨은 곳을 모르겠나이다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

 

 

가끔 이만하면 도덕적으로 하자 없이 살아왔다고 자부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마음속으로 저지른 대죄뿐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낸 털끝만한 잘못까지도 낱낱이 알고 계신 주님, 당신도 아마 아실 겝니다. 제가 비록 남에게 크게 베푼 일은 없지만 남의 것을 탐내거나 남의 것을 훔친 일이 없다는 것을요.

 

그리고 남을 마음으로 미워한 적은 있어도 해치는 짓을 행동으로 한 적은 없다는 것도요. 또한 일생 능력껏 부지런히 일해왔건만 가진 것은 겨우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할 정도지 큰 부자는 못 된다는 것도 제가 주님 앞에 이렇게 으스댈 수 있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참으로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님을 알고 주님을 따르기로 약속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본받을 만한 사람, 추종하고 싶은 사람이 오죽이나 많습니까? 명석하고 위대한 과학자. 하늘의 성좌보다 높게 빛나는 예술가.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력자. 대중의 환호와 박수갈채가 공기보다 더 흔해빠진 인기인, 자손대대 몇 십만 년을 두고 써도 못다 쓸 돈을 당대에 모은 재벌, 이런 사람 다 제쳐놓고 하필이면 삼십대 젊으나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 사상 가장 억울하고 처참하게 죽은 당신을 믿고 따르고 닮아볼 엄두를 내다니요.

 

이런 것을 신앙의 신비라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이 세상을 거쳐간 잘난 사람 다 제쳐두고 당신에게 매료된 자신이 저는 기특하고 자랑스럽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을 놓칠세라 바싹 따라가는 짓 같은 것은 안 합니다. 그건 제 처세술에 어긋나니까요. 저는 제 자식들이 대학에 다닐 때도 아침마다 타일렀습죠. 데모할 때 앞장서지 말아라. 다칠 것 없다. 그렇다고 데모하는 것을 못 본 척 공부만 하지도 말아라.

 

그건 친구한테뿐 아니라 이 시대에도 부끄러운 일이다. 그때가 마침 7,80년대였거들랑요. 그래서 저는 아이들에게 데모할 때 앞장도 서지 말고 뒤로 처지지도 말고 가운데쯤에서 안전하게 하라고 열심히 가르쳤지요. 저는 당신을 따라가면서도 저의 그런 겸손한듯하면서도 실은 비열한 처세술을 느낍니다.

 

이래서는 안 되는 건데, 싶어 허둥지둥 저만치 앞서가는 당신의 모습을 쫓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이 밟고 간 발자취조차 나의 길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저는 있는 힘을 다해 당신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주여, 어디 계시나이까? 지금 어디만큼 가고 계십니까?" 라고요. 그러나 돌아보는 얼굴은 다 당신의 얼굴이 아닙니다. 저는 당신을 쫓고 있었던 게 아닙니다. 가족 같은, 피붙이 같은 이런 동반자들 때문에 이 길이 이렇게 편했던 거로군요. 그들과의 유대감은 참으로 편안하고 달콤해서 좋았습니다.

 

그러나 저를 한없이 편안하게 한 그 좋은 것들과의 유대관계를 끊지 않고서는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주여, 저에게 그 질긴 유대관계를 끊을 수 있는 칼을 주소서. 기왕에 준 칼은 어쨌느냐고요? 그건 남의 허물을 단죄하는 데 하도 부지런히 써먹어서 무디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게 아니라 남을 단죄하는 데는 칼날을, 저를 단죄하는 데는 칼등을 쓰고 있기 때문이라니요?

오오, 주님 어찌 그리 무서운 말씀을... 너무 무안하여 숨을 곳을 모르겠나이다.

(마태 10,37-42)

 

                           ㅡ 박완서님의 "옳고도 아름다운 당신" 묵상 집 중에서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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