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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월 10일 야곱의 우물- 루카 15, 1-3. 11-32 묵상/ 생명의 무게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7-03-10 조회수424 추천수3 반대(0) 신고

생명의 무게

그때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 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주시는군요.’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루카 15,1-3.11-32)

◆「화엄경」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사나운 매를 피해 비둘기 한 마리가 부처님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매는 부처님께 비둘기를 살려주면 자신이 굶주리게 되는데, 이는 자연의 섭리를 어기는 것이라고 했다. 부처님은 옳다 하시고 비둘기 대신 자신의 허벅지살을 잘라주겠다고 하셨다. 그러자 매는 저울을 내보이며 비둘기의 무게와 같은 양의 살을 내어 달라 했다. 부처님이 허벅지살을 한 덩이 베어내어 저울에 올렸는데 비둘기 쪽이 더 무거워 약간 기울어졌다. 다시

 

 

다른 쪽 살을 베어내어 달아도 저울은 여전히 비둘기 쪽으로 기울어졌다. 부처님의 살이 비둘기보다 훨씬 많고 무거워 보이는데도 자꾸 저울이 비둘기 쪽으로 기울자 부처님은 아예 자신의 몸 전부를 그 저울 위에 얹었다. 그러자 저울이 수평을 이루었다. 이 저울은 고기의 근수를 재는 저울이 아니라 생명의 무게를 재는 저울이었던 것이다. 하찮은 비둘기의 생명이라도 그 무게는 부처님 생명의 무게와 똑같기에 비둘기 한 마리를 살리기 위해선 부처님의 생명과 맞바꾸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에 대해 못마땅해한다. 바리사이들의 눈에 죄인들은 잘해 줄 가치가 없는 하찮은 존재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 은전, 아들의 비유를 들어 그 하찮은 존재들의 무게에 대해 설명해 주신다. 한 마리 양의 무게와 아흔아홉 마리 양의 무게는 똑같은 생명의 무게를 지니며, 착한 아들이나 말썽꾸러기 아들이나 그 생명의 무게는 같다는 것이다.

 

반쯤 산 생명도 반쯤 죽은 생명도 없다. 죽거나 살거나, 주검이거나 생명이거나 한 것이지 그 중간이란 없다. 죄인과 의인의 생명 무게도 똑같다. 그래서 우리는 사형제도를 반대한다. 이라크인의 생명 무게와 미국인의 생명 무게도 똑같다. GNP도 문화수준도 종교도 생명의 무게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든 전쟁을 반대하는 것이다. 경제적 능력도 없고 정신연령도 낮은 장애인들을 보살피고 돌보는 이유도 우리 모두가 같은 무게를 지닌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동훈 신부(원주교구 살레시오의 집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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