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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용서는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3-10 조회수755 추천수3 반대(0) 신고

 

 

<용서는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11-32)



  어느 신부님 강론에서 고백소에 앉아 교우들의 고백을 들으면서 안타깝게 느끼시는 것이 몇 가지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나, 시어머니 등등 이웃의 죄를 고백하는 경우와 제 자신의 죄를 사실대로 고백하지 않고 얼버무리는 경우라고 합니다. 또 과거에 고백한 죄를 자주 반복하여 고백하는 경우도 안타깝다고 합니다.

  비록 자신이 지은 죄가 아무리 크다고 생각되더라도 통회하고 고백하여 용서를 받았다면 또 다시 그 죄를 짓지 않는 한, 죄의식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지나치게 죄의식에 사로잡혀, 과연 신부님께서 주시는 사죄경이 자신의 죄를 깨끗하게 사해 주는지 의심하는 모습이랍니다.  그것마저 악마의 유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의식은 우리를 지나치게 우울한 감정에 빠트려 신앙생활에 기쁨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며, 심하면 자포자기에 빠져 더 심각한 죄를 지을 수도 있답니다.


  오늘복음에서 둘 째 아들은 지니고 있던 돈이 다 떨어지고, 하도 배를 곯아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라도 먹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나마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제야 정신이 든 그는 크게 뉘우치게 됩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멀리서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발견한 아버지는 아들의 심정을 다 알아채고 한 걸음에 뛰어가 껴안습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캐어묻지도 않고 그냥 받아들입니다. 과거에 대해 고백하는 것도 막아버립니다. 그저 잔치를 벌이도록 종들에게 명령할 뿐입니다.

  또 큰 아들이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의 처사에 화가 나서 버르장머리 없이 따져 물어도 그 아버지는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기뻐 잔치를 벌이는 이유만 설명해줄 뿐입니다.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기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자매가 영세 받기 전에 낙태한 죄를 첫 고백성사에서 통회하고 고백하여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자기 생각에 너무도 큰 죄인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저지른 죄에다 합쳐 마치 도매금으로 넘기듯, 가벼운 보속만 주시는 신부님의 처사가 미덥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꿈속에서 간난 아기가 나타나고 귀신이 보이는 둥, 잠드는 것마저 괴롭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꾸 낙태한 죄에 대해 죄의식이 들어 힘들기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신부님 저 신부님을 찾아다니면서 고백성사를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죄의식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기를 몇 년을 지내다 보니 자연히 냉담하게 되고 심지어 점집에도 찾아가 묻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마침 이웃에 사시는 신심이 깊은 레지오 단장님과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자연 신앙문제를 나누게 되었고, 낙태에 대해 말이 오갔습니다. 그 자매는 자연히 자신의 고민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단장님이 고백성사 볼 때 신부님께 아주 구체적으로 그간의 사연을 상담하듯이 털어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신부님께서는 아주 자상하게 모든 내용을 들으신 후에 유혹의 근원이 고백성사의 유효성을 믿지 못한데서 왔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죄의식을 계속 지니는 것도 죄가 될 수 있으니,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보속으로 낙태 아이를 위한 미사지향과 9일기도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번 용서하신 죄는 되묻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몇 칠 지나지 않아 마음이 편안해 지고 잠도 잘 자게 되었습니다. 9일기도는 저절로 기쁘게 바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죄 많은 여인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습니다. 모든 사랑의 원천은 먼저 하느님께로부터 죄를 용서 받는 은총에 있습니다. 신앙으로 자신의 죄를 인식하게 되고, 또 자신의 죄를 용서 받았다는 체험을 하고난 뒤에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께 작은 사랑을 올릴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는 둘 째 아들이 떠나가도 말리지 않습니다.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아들의 자유를 존중해서입니다. 그것이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돌아와 회개하자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이십니다. 여기에 두 가지 자유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귀스탱 조르즈 신부님은 “용서는 상호 존중이며, 두 자유가 상봉하는 장소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또 “용서는 과거를 묻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주님께 받은 용서를 본받아 이웃을 용서할 때 과거를 묻지 않으며, 상대방의 자유의사를 존중하고 조건 없이 베푸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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