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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제 67회 마지막 회. 하느님 품에 안긴 요셉신부. ~♠†
작성자양춘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7-03-11 조회수633 추천수10 반대(0) 신고

 

†♠~ 제 67회 마지막 회. 하느님 품에 안긴 요셉신부. ~♠†


셉 신부의 건강을 돌봐주는 주치의의 반대를 물리치고 중국 순례를 다녀온 요셉 신부는 귀국한지 이틀 만에 또다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셉 신부님 이번 여행은 너무 무리하신 것 같습니다.”  

“무리하긴요.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 왔는데요.”

“건강 상태가 많이 나빠졌는데요.”

“늙었으니 나빠지는 것이야 당연하겠죠.”

오랫동안 요셉 신부의 오른손 역할을 해온 비서 골롬바 자매와 식복사 루시아 자매는 불안한 마음이 들어 요셉 신부의 곁을 잠시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나도 죽을 때가 되었나 보네.”

“신부님, 무슨 그런 말씀을....아직도 할 일이 많잖아요.

 신부님, 오래 사셔야 되요.”

“그건 욕이여, 갈 때가 되면 가야지. 중국 순례중에도 이 늙은이 끌고 다니느라고 모두들 얼마나 수고를 많이 했는데,

몸뚱이가 남의 신세를 질 때가 되면 얼른 죽어야지.”

“신부님 얼른 나아서 일어나세요.”

“끔찍한 소리를 하덜 말어!

내가 나으면 앞으로 또 아플 만큼 아파야 죽을 텐데.

날보고 이 끔찍한 고통을 또 겪으라고?”

“하지만 하실 일이 많이 남아 있잖아요?”

“나를 돌봐주느라고 힘들 텐데 이제 집에 들어가 쉬지들 그래!”

“신부님, 우리는 괜찮아요.

루시아가 죽을 맛있게 쑤어 왔는데....좀 드세요.”

“루시아가 정성껏 만들어주는 음식을 먹고 내가 이렇게 잘 지내 왔는데 살아 있는 동안이라도 먹어야지.

자! 우리 같이 먹을까?”

요셉 신부는 참을 수없는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아픈 내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정성을 다한 의사들의 노력도 보람이 없이 요셉 신부는 입원한지 18일 만에 84세를 일기[1990년 7월 30일]로 하느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거목이 쓰러진 것입니다.

오기선 요셉 신부는 순교자의 후손으로서 신앙 선조들의 위대한 업적을 찾아 팔도강산 구석구석을 누볐고 지구를 세 바퀴 반도 더 될 정도로 돌아다니면서 우리 교회에 많은 업적을 남겨 놓았습니다.

오 요셉 신부가 선종하자 종파를 떠나 수천수만의 형제자매들이 그의 영전을 찾아와 오열하며 슬퍼하였습니다.

여름의 삼복더위에도 불구하고 콩나물시루처럼 빼곡하게 끼어 앉은 신자들의 연도 소리는 24시간 동안 끊일 사이가 없었습니다.

장례미사 때도 입추의 여지없이 명동성당 안팎에 인산인해를 이룬 교우들을 보면 고 오기선 요셉신부님이 생전에 쌓은 훌륭한 성덕을 증명해주고도 남았습니다.

장례미사 강론 중에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하늘의 큰 별이 떨어졌다고, 그는 한국 천주교회의 큰 별이었다고 하셨습니다.

고 오기선 요셉 신부님은 용인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습니다.

만민의 사랑을 받던 그분의 모습은

이제 사진으로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기선 요셉 신부님 영전에 이 글을 바칩니다,

 부디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

 주님, 요셉 신부님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비추소서.....아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로서 오기선 요셉 신부님 이야기를 맺습니다.

그동안 함께하여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훌륭한 업적을 이루신 신부님의 글을 끝까지 올릴 수 있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 찬미 드립니다.

대단히 감사 합니다.


   


 

** 오기선 요셉 신부님의 약력 **


1907년 경기도 용인에서 출생.

1932년 사제 서품 받음.

1936년 혜화동 성당 주임.

1941년 한국 최초의 주교를 탄생시키는데 성공.

1944년 5월 평남 안주성당 주임.

1944년 12월 충남 대전성당 주임.

1947년 충남 애육원 원장 피임.

1952년 충남 사회사업 연합회 회장 피선.

1955년 충남 대학교 문리대 불어 강사 피임.

1956년 충남 대학교 종교 철학과 강사 피임.

1961년 한국 천주교회 인보 회장 피임.

1963년 한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여.

1964년 충남 대전 지방법원 가사 조정위원 피선.

1964년 BBS 대전시 지부장 피선.

1964년 민간 구호 대책 위원회 위원장 피선.

1964년 학교법인 천주교 대전교구 대지학원 설립 및 이사장 취임.

1965년 서울 대방동성당 주임.

1966년 가톨릭 의대 종교학과 및 라틴어 강사.

1935~1939년 중앙 방송국 종교 방송 담당

1945년~1976년 KBS 라디오 종교 방송 담당.

1971년 은퇴.

1973년 103위 시성 촉진 위원 피명.

1983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사업 위원회 시성 후보 표준 영정 제작  역사 고증 위원 위촉.

1984년 신유박해 순교자 98명 시복 시성 촉진 위원회 위원.

1985년 중국 마카오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동상 건립.

1990년 중국 북경, 상해, 금가향, 횡당, 소팔가자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신앙의 선조 이승훈의 동상 건립 전초 작업을 해 놓고 귀국.

1990년 7월 30일   선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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