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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하라!!! / 이인주 신부님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3-13 조회수622 추천수6 반대(0) 신고

구하라!!!


지혜를 말하라고 하면 쉽지 않아 지혜가 이것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말을 해야 한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공자는 “아침에 道를 깨닫는다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다.”

 

이런 것을 놓고 지혜를 말한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즉 여기서의 道를 구함은 곧 지혜를 구하는 것이고, 그 지혜란 德에 나아가 얻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인생을 멋지게 살고자 한다면 物에서 나오는 어떤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靈에서 나오는 그 어떤 것을 추구해야하지 않겠는가? 이 영역을 제대로 살아내는 사람들이 바로 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럼으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를 원한다면 지혜의 근원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 지혜의 근원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 지혜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물론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될 수 도 있다.

 

그러나 인간 삶에 참 의미를 부여하고 살기를 원한다면 어떤 방법으로든지 지혜의 샘인 그 근원을 물으며 살아야할 것이다.

 

우리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에겐 좋은 양식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관상과 묵상 안에서 그분과의 만남이다. 한 두 번의 관상이나 묵상 안에서 그 심오한 진리인 지혜나 사랑이 구해지는 것은 아니나, 인생을 한번 삶에 있어 자신의 목표를 뚜렷이 하고 정진한다면 그 안에 맺어지는 결정체가 있을 것인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지혜일 것이다.



지혜를 말하면 지혜서보다 집회서가 더 도움이 되듯이, 소크라테스보다 유스티노 성인이 더 먼저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스티노 성인도 공부라는 공부는 나름대로 하고 뭔가 의문이 생겼다.

 

참 지혜와 진리가 있기에 이런 학문들이 있을 진데 그 근원을 가르치는 사람이 없으니 어쩔 고 하고 고민에 고민을 하다 당대의 석학들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유스티노 성인을 더 고민하게 하였다.

 

이유인 즉, 피타고라스학파의 사람들은 수학을 더 공부하고오라 하고,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학파의 사람들은 철학을 더 공부하라하고, 심지어 어떤 학파의 사람들은 그것을 알기를 원하면 돈을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에이, 이것은 아니지 하며 더 깊은 고민에 잠긴 유스티노는 번잡한 번뇌를 식히고 삭히기 위해 바닷가를 산책하게 되었고, 생각지도 않게 다가오는 노인의 손으로부터 성서를 받아들고는, 그 안에 자신이 고민하던 모든 지혜가 다 잠자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럼으로 성서 안에서 인간의 지혜는 물론 하느님의 지혜와 사랑까지 얻게 되니 이것이야말로 천상의 선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느님은 구하는 사람에겐 어떤 방법으로든지 다 채워주시는 분임을 새삼 유스티노 성인을 통하여 알게 하는 대목이다.



성서에서 예수님은 구하는 사람들에겐 어떤 방법으로든지 다 그 해결방법을 주셨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분과의 신뢰이다. 신뢰가 없다면 그분은 절대로 주지를 않는다.

 

물론 그냥 떨어지는 것을 얻어먹는 경우는 있지만, 제대로 된 것을 얻기 위해선 반드시 그분과의 신뢰가 만들어져야한다. 마르코복음 9, 14-29에 간질을 알고 있는 아들을 둔 아버지가 찾아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치유를 부탁하지만 치유를 못한다.

 

왜 그러면 그 치유를 못하고 있을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치유의 은사를 전수하지 않아서일까? 아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의뢰하는 사람과 치유하는 사람의 마음의 일치, 즉 신뢰가 형성되어 그 안에 하느님께서 함께 하셔야 하는데 그것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질 않은 것이다.

 

즉, 구하는 사람들의 신뢰와 생각이 순수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했던 것이 원인이다. 먼저 제자들은 치유를 놓고 논쟁을 하고 있다. 순수하게 하느님아버지의 힘으로 치유를 해도 될까 말까 한데 논쟁을 하고 있으니 어떻게 치유가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치유를 의뢰하는 아버지도 예수님께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마르9,22) 하자 예수님께서 단칼에 쳐 버리신다.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9, 23) 그제야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마르9,24) 하자 그 아이를 그 자리에서 치유하게 하신다.

 

물론 그 아이가 치유되긴 했지만 얼마나 복잡했는가. 그냥 순수하게 믿으면 쉽게 지혜와 사랑이 그 자리에 함께하여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이루어 졌을 것을 온갖 시험과 쇼를 다한 셈이 아닌가? 물론 그래서 여러 케이스를 만들어 놓긴 했지만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정확히 봐야하는 것은 지혜와 사랑은 자신의 지식이나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신뢰에 근거한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제대로 깨달아야한다.

 

그것이 확실한 사람은 모든 기적도 가능한 것이고, 영원한 시간과 한정된 시간도 오갈 수 있는 은총을 부여받음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믿어서 남 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분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음을 깨닫자.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지혜요 사랑이다. 믿고 구하는 자에겐 다 열어주시는 좋으신 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시다.

 

 

                                                                                      <예수회 홈 페이지>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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