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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스물다섯 살 처녀가 . . . . . . . [안상철 신부님]
작성자김혜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7-03-16 조회수1,037 추천수10 반대(0) 신고

 

 

 

 

 

따뜻한 봄 기운이 잔잔히 퍼져 가고 있는 어느 봄날,

한 신자 가정을 방문했다.

 

할머니 혼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 그 가정에는

막내딸이 함께 살고 있었다.

처음 만난 스물다섯 살의 젬마라는 그 처녀는

심한 소아마비 증세로 걸음을 아주 힘들게 걷고 있었다.

 

건강이 나쁘니 얼마나 불편하겠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고,

장래에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물어 볼 수도 없었다.

따라주는 차를 마시면서 방을 둘러보다가

그녀의 전축 옆에 수많은 음반이 꽂혀 있음을 보았다.

 

"음악을 아주 좋아하시나 보죠?"

 

"어머, 신부님도 음악을 좋아하세요?"

 

", 무척 좋아하지만 들을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신부님은 무슨 음악을 좋아하세요?"

 

"베토벤의 전원교향곡이요."

 

"그러세요? 신부님도 저와 똑같은 음악을 제일 좋아하시네요."

 

"그 음악을 들으면 평화로운 시골 풍경 속에 파묻혀 잔디에

 조용히 누워 있는 편안한 기분이 듭니다."

 

내 나름대로의 느낌을 말하며 아주 짧고 유익한 대화를 나누었다.

피아노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며 어머니를 도와 살고 있는 그녀는

자신의 건강문제로 퍽이나 비관하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언젠가 시간이 허락하면

그녀와 좀더 깊은 대화를 나누어 보리라...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살든

그 나름대로의 삶의 가치가 있음을 말해 주리라...

마음 먹었다.

 

그러나 차일피일 미루다 대화는 이루어지지 못했고

한 해가 넘어갔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는 어느 날,

주일미사에 젬마가 갑자기 나타났다.

미사에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전혀 성당에 발을 디디지 못하던

그녀였기에 무척 반갑게 느껴졌다.

 

"젬마씨,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어떻게 성당에 나오셨습니까?"

 

"그냥 한 번 와 봤어요."

 

그녀의 대답은 너무나 단순하고 무의미하게 짧았다.

그날 주일미사를 모두 마치고 나른한 몸으로

오후에 사제관에서 쉬고 있다가

놀라운 전화를 받았다.

 

"신부님! 젬마가 죽었어요..."

 

한걸음에 달려간 나는

죽음의 현장을 있는 그대로 목격할 수가 있었다.

그녀는 잠을 자는 듯 누워 있었다.

정말로 평화로운 잠을 자는 것 같았고...

그녀의 머리맡에는 약병이 놓여 있었다.

 

'이런, 바보! 자신의 생명을 끊다니...,'

 

신앙인들에게 있어,

아니 어느 누구도 마찬가지이지만 자신의 생명을 끊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저버리는 잘못이기에 큰 죄이고,

하느님이 주인인 생명을 제 멋대로 버렸다는 것으로

또 다른 큰 죄이다.

 

젬마는 자살이 그렇게 큰 잘못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을까?

나는 주체할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을 느끼며,

나의 눈이 전축에 머무는 순간,

깊은 감동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전축 앞에 뽑아 세워 놓은 한 장의 레코드는

레퀴엠(REQUIEM)이라는

그레고리안 성가곡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가 그것을 발견하기를 바라기라도 한 듯이

문에 들어서면 바로 눈에 잘 띄게 전축 앞에 세워 놓았던 것이다.

레퀴엠이란 죽은 이들을 위한 장례미사에 쓰는

그레고리안 장송곡이다.

 

'주여, 그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젬마는 장송곡을 들으면서 죽어간 것이다.

그녀가 그날 마지막으로 미사에 왔던 이유도

하느님께 용서와 자비를 청하기 위해서였으리라...

 

넓은 마당에 있는 아름드리 그루의 은행나무가 노랗게

불타올라 하늘과 집과 사람과 눈물을 노랗게 적시고 있었다.

 

몇몇 열심한 교우들만 불러 조용하게 집에서 미사를 드렸다.

' 탓이요!'만 끊임없이 되뇌었다.

 

착한 영혼에게,

나는 아무것도 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녀가 신체적 부자유로 인해 목숨을 끊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녀에게 하느님의 뜻의 고귀함을 알려주지 못했단 말인가!

 

[우리가 명석하지 못한 두뇌, 능력 부족, 나약한 신체와 같은

 선천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불평하지 말도록 합시다.

 우리가 많은 재능,

 보다 건강한 신체,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더라면

 혹시...

 나쁜 길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는 육신적 병을 얻었을 ,

 이를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물론 정상적인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도 효과가 없을 때에는 스스로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도록

 노력합시다.

 그분은 건강보다도 훨씬 귀한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알퐁소 성인의 말씀 마디가 그녀의 인생을 크게 바꾸어

놓을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는 자책감에 힘들던 기억이 생생하다.

 

.....

 

사람의 존재 가치는 참으로 크다.

더구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 창조된 우리의 존재 이유를 ,

모습과는 상관없이 얼마나 값진 삶을 살아야 되는지 알게 된다.

 

비록 내가 아무것도 없는 존재이고

남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보잘것 없는 존재로 보인다 할지라도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안다면

무능과 보잘것 없음 그자체가 빛나는 진주와 같은 것이다.

 

교황 23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결국 나는

오직 하느님의 일촉의 신호에 복종하기 위해 살아갈 뿐이다.

나는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는 ,

하나,

발가락 하나,

눈길 하나도 움직일 없으며,

 

앞에 서서 모든 것을 각오로,

속에까지 뛰어들 각오로,

 

나는

앞에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 [치마입은 남자의 행복]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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