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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영적 인생 / 이인주 신부님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3-24 조회수649 추천수4 반대(0) 신고

영적인생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면서 적어도 두 번의 인생을 산다고 할 것이다. 첫째인생은 육적인생을 살고 둘째 인생은 영적인생을 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점이 천차만별인지라 사람들은 그때가 언제인지 헛갈려한다.

 

그러기에 우리에겐 영의식별이나 분별 있는 삶이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이런 것 없이 사는 인생은 편안할지는 몰라도 참 의미를 부여하며 산다고는 이야기하기 곤란할 것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영적인생의 여정이 어디부터냐고 묻는다면 참 어려운 질문이라 답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거기에 답을 하라하면, 그건 청년기의 완성단계인 출가의 그 무렵이라 이야길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성모님과 싸리문을 사이에 두고 마지막 인사를 하고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요르단강가로 떠나던 그 시점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올 때 홀연히 펼쳐지던 천상의 드라마가 바로 예수님을 영적인생에로의 전환점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베드로사도의 모습도 잘 포착된다고 볼 수 있다. 베드로사도가 예수님께 엎드려 떠나달라고 하며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는 대목이 바로 베드로가 육적인생을 마감하고 영적인생으로 옷을 바꿔 입은 순간이라 이야기 할 수 있다.

 

물론 그 이전으로 그 시점을 잡을 수도 있지만 사실은 회심하는 그때가 바로 육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의 이전일 것이다. 사람들은 영적여행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쉽게 그리로 이전하지 못한다.

 

왜일까? 그것은 자신의 벽이 있고, 그 벽속에 자신이 최고이고, 자신만의 영역이 있으며, 이것을 내주면 나는 뭐야, 아니면 내가 곧 무너질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이다. 그런데 그 벽을 과감하게 부수고 천사의 날개를 달 때 우리는 육적 여행에서 영적여행으로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육적여행도 그 맛과 여운이 있지만, 영적여행은 더 깊은 맛과 향이 있음을 알아야한다. 그 맛과 멋을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들은 자신의 전 인생을 팔아서라도 그 길에 올인 한다는 것이다. 그 맛이 무엇인지 보기로 하자.



베드로사도는 분명 혼인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예수가 어떤 사람인가를 확인한 후엔 자신의 전 인생을 버리고 떠날 수 있었다. 그럼 그 떠나는 과정이 쉬웠을까? 그렇지 않았다. 베드로인들 자신의 가족과 자신의 직업을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몇 가지의 검증을 걸치는 순간에 그도 모르게 영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사실 복음을 잘 보면 베드로도 고기잡이에 관한한 자신이 대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목수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 와서 그물질과 고기잡이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길 하니, 처음엔 신뢰가 갔겠는가. 그러나 이어지는 뱃고물에서의 강의는 점차 베드로의 속을 흔들어 놓았고, 몇 차례의 만남에서 예수의 속내를 서서히 읽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완전히 속을 뒤 짚는 이야길 하는 예수, 밤새 물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고 헤매다 돌아온 형제들에게 다시 나가서 그물을 치라는 것이다. 이때 베드로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자기가 뭔데, 고기잡이에 대해 뭘 모르는 사람이,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으려 하네.......

 

그러나 베드로가 변한 것은 저분 안에 뭔가가 있다는 것을 요 몇 칠 사이에 알아낸 것이다. 그러니 피곤하고 힘들고 기분도 안 나지만 그분을 믿고 다시 출어를 한 것이다. 이 부분이 바로 자신의 벽을 허물기 시작한 시점이다.

 

그래서 베드로를 육적인 사람에서 영적사람으로 바꿔 놓은 영역이다. 우리는 뭔가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허물지 않고서는 이런 영광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고기잡이의 아마추어였다면 예수님은 프로였고 프로를 넘어 달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제가 관상 안에서 본 예수님은 호수속의 물고기의 움직임을 관상 안에서 지도를 그리며 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베드로가 그 느낌을 받은 순간 어떻게 변화하지 않을 수 있었단 말인가.

 

그러니 천하의 베드로인들 말로만 하는 그분이 아니라 실행에 옮기시는 그 분 앞에 엎드려 콧물 눈물을 어찌 안 쏟을 수 있었단 말인가? 이런 과정을 거치고 있는데 자신의 벽이 아무리 높다 해도 어찌 아니 허물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허물이나 벽을 허물 수 있다함은 분명 은총이다.

 

그리고 그런 은총은 그분의 힘입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런 때가 온다면 과감하게 자신을 열어 젖혀야하고 그래서 더 이상 내가 나를 맘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이끌어 가시게끔 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회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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