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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미리읽는 성서묵상 [성주간-화요일-]& 영상으로 초대
작성자원근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7-04-02 조회수760 추천수0 반대(0) 신고
★ 성서묵상과 영상으로 초대 (화요일) ★

    ◈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요한. 13,21-33.36-38 그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셔서]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을 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쭈어 보게 하였다. 그 제자가 예수님께 더 다가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빵을 적신 다음 그것을 들어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식탁에 함께 앉은 이들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도 몰랐다.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예수님께서 그에게 축제에 필요한 것을 사라고 하셨거나, 또는 가난한 이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이려니 생각하였다.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유다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이제 너희에게도 말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베드로가 다시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당신을 배반할 것을 미리 알고 계시면서도 그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따뜻한 관심을 보이시면서 당신 곁으로 맞아들여 손수 빵을 떼어 주십니다. 빵을 직접 떼어 주는 것은 이스라엘의 풍속에서 특별한 우정의 표시를 뜻하는 것인데, 유다는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받자마자 사탄의 침입을 받게 됩니다. 곧, 예수님의 사랑의 호소가 오히려 유다에게는 예수님을 팔아 넘기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마음이 사탄의 마음으로 굳어진 것을 보시고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하고 말씀하시며 유다를 보내 주십니다. 성경은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를 분명하게 이야기해 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의 배반이 금전적인 문제와 연관되었음을 간접적으로 언급함으로써 독자들이 그 이유를 짐작 하게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을 넘겨주는 대가로 돈을 요구한다든지, 요한 12장 6절의 말씀처럼 돈주머니에 든 돈을 가로 채곤 하는 유다의 모습을 통하여 돈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팔아 넘긴 것으로 대략 이 사건의 전말을 예측하게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유다가 당신을 배신할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시면서도 그것을 응징하지 않으시고 더 큰 사랑으로 맞아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유다는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내일의 복음 말씀에서 다시 이어지는 유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하여 좀 더 깊이 묵상해 보도록 합시다.

    ◈ "주님 그게 누굽니까?" <또 다른 배신자>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복음서 안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 두 제자의 배반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스승을 배반한 두 제자는 당시 제자 공동체 안에서 나름대로 "한 자리", "한 가닥씩"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베드로는 수제자였습니다. 그로 인한 자부심도 대단했습니다. 위세가 등등했습니다. 특히 틈만 나면 치고 올라오는 다른 제자들에게. 유다 역시 제자 공동체 안에서 중요한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제자 공동체의 살림을 담당한 총무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가장 신뢰가 가는 인물, 인간성도 괜찮고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할 수 있는 인물로 생각했기에 총무를 맡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공동체 안에서 가장 중책을 맡은 공동체의 두 핵심 인물, 제자 중의 제자, A급 두 제자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두 제자의 배반 사건을 오늘날 교회 및 사회 지도자들은 눈 여겨 바라보면서 깊이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 가장 핵심 위치에서 교회를 인도하는 사람들 입니다. 때로 그들은 교회 안에서 살며, 교회 가장 가까이에서 지내 면서 교회를 위해서 가장 열심히 봉사하는 듯 보이지만, 많은 경우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먼 사람으로 전락할 위험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지속적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거듭 본질에로 회귀하지 않으면, 자신의 직책이 희생과 봉사, 섬김과 죽음의 자리임을 거듭 자각하지 않게 될 때 언제 배반자가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역할이 다른 무엇에 앞서서 십자가를 지는 자리이고, 끝까지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는 자리임을 망각하는 순간 그 지도자 는 또 다른 배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예는 베드로의 배반 사건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 는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쓴 잔을 거부했기에, 베드로는 그 뒤로 입으로만 수제자였지 몸은 배신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아들은 많은 고난을 겪고 죽을 것이다"고 말씀 하셨을 때 베드로가 펄쩍 뛰면서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 으로 드러내 주는 표현입니다. 베드로는 입으로는 어떤 충성도 다 합니다. 그 어떤 맹세도 다짐도 다 합니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 치 않으면 언제든지 예수님을 뿌리치고 도망갈 가능성, 예수님을 배신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남들이 봤을 때는 그럴듯한 신자, 잘 나가는 수도자, 괜찮은 사제로 보이고 인정받지만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에 우리의 시선이 멀어지는 그 순간 언제고 주님으로부터 등을 돌릴 가능성, 주님을 배반할 가능성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하느님의 오묘하신 섭리에 대해서 묵상거리를 주십니다. 오늘의 복음을 통해서 보면, 예수께서는 친히 뽑으신 열두 사도 중 한 사람인 유다사도를 배반하게 하시고, 당신 자신을 유대인들의 손에 넘어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건으로부터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승리를 가져오셨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헤아리기 힘든 방법입니다. 하느님의 방법은 참으로 오묘하셔서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으시는 방법으로 구원사업을 하십니다. 제 1독서에 나오는 이사야 예언자의 고백이 하느님의 깊은 섭리를 단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야훼께서 태 중에 있는 나를 이미 부르셨고 내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에 이미 이름을 지어주셨다."(이사49,1) 이 말씀은 자신의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자신에게 사명을 맡기시기 전에 깊이 배려 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이렇게 해 주십시오, 저렇게 되어야 합니다 하며 고집을 피우곤 합니다. 참다운 신앙은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분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뜻 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도록 원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특히 어려운 일이 닥칠 때, 이해하기 힘든 일이 생길 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제 안에 주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시기를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해봅니다. ..................... 기 도 주님, 주님은 저의 참 주인이시오니 제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주관하소서. 제가 아무리 바라는 것이 있더라도 주님께서 아니라 하시면 아니게 하시고, 제가 아무리 피하고픈 것이라도 주님께서 하라 하시면 따르겠나이다. 주님, 주님의 지혜로 저를 인도하셔서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소서. 아멘.

    ◈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 헬렌 켈러가 어느 날 숲 속을 다녀온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을 보았느냐고. 그 친구는 별반 특별한 것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헬렌 켈러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두 눈 뜨고도 두 귀 열고도 별로 특별히 본 것도 들은 것도 없고, 할 말조차 없다니…. 그래서 비록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했던 헬렌 켈러였지만 그녀는 스스로 만약 자신이 단 사흘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어떤 것을 보고 느낄 것인지 미리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내가 사흘 동안 볼 수 있다면(Three days to see)' 이란 제목으로 '애틀랜틱 먼스리' 1933년 1월 호에 발표했습니다. 헬렌 켈러의 글은 당시 경제 대공황의 후유증에 허덕이던 미국인 들을 잔잔히 위로했습니다. 그래서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이 글을 '20세기 최고의 수필'로 꼽았습니다. 「첫째 날, 나는 친절과 겸손과 우정으로 내 삶을 가치 있게 해준 설리번 선생님을 찾아가 이제껏 손끝으로 만져서만 알던 그녀의 얼굴을 몇 시간이고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 모습을 내 마음속에 깊이 간직해 두겠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바람에 나풀거리는 아름다운 나뭇잎과 들꽃들 그리고 석양에 빛나는 노을을 보고 싶다. 둘째 날, 먼동이 트며 밤이 낮으로 바뀌는 웅장한 기적을 보고 나서, 서둘러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박물관을 찾아가 하루 종일 인간이 진화해온 궤적을 눈으로 확인해 볼 것이다. 그리고 저녁에는 보석 같은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마무리하겠다. 마지막 셋째 날에는 사람들이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아침 일찍 큰길에 나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볼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오페라하우스와 영화관에 가 공연들을 보고 싶다. 그리고 어느덧 저녁이 되면 네온사인이 반짝거리는 쇼윈도에 진열돼 있는 아름다운 물건들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와 나를 이 사흘 동안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다시 영원히 암흑의 세계로 돌아가겠다.」 헬렌 켈러가 그토록 보고자 소망했던 일들을 우리는 날마다 일상 속에서 특별한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보고 경험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지는 모릅니다. 아니 누구나 경험하고 사는 것처럼 잊어버리고 삽니다. 그래서 헬렌 켈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일이면 귀가 안 들릴 사람처럼 새들의 지저귐을 들어보라. 내일이면 냄새를 맡을 수 없는 사람처럼 꽃향기를 맡아보라. 내일이면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처럼 세상을 보라"고! 내일이면 더 이상 할 수 없는 일임을 알게 되면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놀라운 기적 같은 일인지 뒤늦게나마 깨달을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음자리의 행복편지" 중에서 .......................... 생의 한가운데 전 더듬는 일에 지쳤어요. 끝도 없어 보이는 그 어두운 길을 늘 더듬거리고 있잖아요. 그럴 때마다 자유로워지고 싶고 저를 둘러싼 세상보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은 소망이 간절해져요. 하지만 당신이 제게 보여 준 진리를 떠올리면 다시 힘을 되찾고 기뻐지지요. 전 결코 장님이나 귀머거리가 아니 예요. 제 영혼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신의 영광을 보니까요. 떠들 석한 이 세상을 초월하여 자랑스럽게 들려 오는 사랑의 노래를 들으니까요. 제가 장애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스웨덴보리가 말했듯이 지상의 것들이 일으키는 모호함과 어두움 때문이에요. 저는 눈과 귀를 가진 사람들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착각 하는 오만함을 비웃을 수 밖에 없어요. 사실 그들이 보고 있는 건 그늘이죠. 그들이 알고 있는 건 아주 작은 부분이에요. 사람들은 영혼이 실제라는 것, 생명이라는 것, 힘이라는 것, 그것들을 통해 갈등 속에서 조화를, 불완전 속에서 완전을 빚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해요. 하버드 대학 재학 중에 히츠에게 쓴 편지 저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생각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저만의 생각과 남다른 저의 경험을 글로 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지난 10월 선생님 수업에서, 저는 다른 사람들 과 똑같아지려고 온 힘을 다했습니다. 제약있는 환경을 되도록 완전히 잊으려고 애썼던 셈이지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현실을 모르고 꿈만 꿨던 어리석은 일로 비칩니다.. 이제부터는 그저 제 자신이기로, 저만의 삶을 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생각이 떠오를 때 그 생각을 글로 옮기기로 결심했습니다.. 하버드 대학 재학 중에 코플랜드 교수에게 쓴 편지 모든 사물은 촉각과 질로써 내 머리에 자리잡는다. 그 촉각의 질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방법으로 조합되어 내게 힘, 아름다움, 불일치를 느끼게 한다. 나는 손으로 물체의 모양을 더듬어서 그 아름다움을 느낄 뿐 아니라 우스운 모양까지도 알 수 있었다. 손은 얼굴만큼 알아보기 쉬울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감추고 있는 것을 더 잘 보여 준다. 사람들은 낯빛을 꾸밀 수 있다. 하지만 손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정신이 침체되어 있거나 낙심하면 손은 긴장이 풀어지고 늘어진다. 하지만 흥분하거나 마음이 기쁠 때는 손의 근육에 힘이 들어간다. 그 사람이 오래도록 지녀 온 특성이 항상 손에 새겨진다. 나는 색에 관한 이야기와 글을 무척 많이 말하고 또 읽었다. 그래서 겨우겨우 그 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추상적인 낱말의 뜻에 다가가는 방법과 똑같다. 예를 들면, 희망, 이상주의, 일신교, 지성 같은 낱말은 눈에 보이는 물체로 그 뜻을 깨우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뜻은 무형의 개념과 구체적 사물 사이에서 형성된 생각의 공통점 을 찾음으로써 알 수 있다. 이같은 교육 방법 덕택에, 나는 하얀색은 고상하고 깨끗하며, 초록색은 화려하고, 빨간색은 사랑이나 수치나 힘 등 뜻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내 몸의 모든 원자는 진동계이다. 집안 어디에서나 느껴지는 흔들림으로 날마다 무슨 일들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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