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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마지막까지 기회를 주시는 분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4-04 조회수716 추천수6 반대(0) 신고

 

 

<마지막까지 기회를 주시는 분>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마태 26,14-25)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22절) 이 말은 인간이 얼마나 죄에 나약한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자기가 죄를 지을지 아닐지도 장담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죄악에 맞닥트렸을 때 벗어나기 어려운 모습을 너무나 절실하게 그렸습니다. 누구라도 배반의 나락에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특별히 유다라서가 아니라 인간인 한 누구라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자세입니다. 죄 지을까 두려워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의 깊은 자기이해입니다. 그러기에 주의 기도에서 우리가 유혹에서 지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다는 예수님에 대한 호칭을 바꾸어 부릅니다. 아주 작은 변화이지만 복음서 저자는 의도적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25절)

 유다는 예수님을 주님(퀴리오스)이 아니라, 스승님(랍비)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이라는 호칭은 그분을 신앙의 주님으로 모신다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즉 그는 스스로 신앙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스스로를 단죄하였습니다.

  보통 사람이 거짓말을 할 때 눈동자가 흔들리듯 그는 지금 내면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평소 같으면 아무 거리낌 없이 불렀을 주님이라는 경칭이 차마 입에서 나오지 못하고, 그저 선생이라는 정도의 뜻만 지닌 랍비라고 부릅니다. 도둑이 제발 저린 꼴입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라는 예수님의 대답은 수난기에서 3회(26,25.64; 27,11) 나옵니다. “네가 말한 그대로이다.” 쯤으로 알아들으면 됩니다.

  그 속뜻은 “네가 한 말에 따라 너는 의롭다고 선고받기도 하고, 네가 한 말에 따라 너는 단죄받기도 할 것이다.”(마태 12,37) 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죄를 스스로 판정 받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탓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26,24)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정말 잘 묵상하여야할 대목입니다. 사람의 아들의 운명이 성서에 기록된 대로 떠나가겠지만, 팔아넘기는 그 사람을 하느님께서 이용하시지는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결국 유다의 배반을 하느님께서 이용하신 것이 아니냐고 의구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말하는 불행선언은 하느님께서 악의 협조를 받으실 리가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불행을 주실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구원을 주시는 분이 악의 협조를 받을 리가 없습니다.


  죄 자체는 구원사업에 보탬이 될 수 없고, 하느님께서 이용하는 기회도 될 수 없습니다. 죄를 없애시러 오신 분이 죄를 이용한다는 것이 모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리 중죄인이라 하더라도 용서의 대상은 될지언정 죄 자체를 긍정하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유다는 “소가 남의 남종이나 여종을 받았으면, 그 주인에게 은 서른 세켈을 갚아야 하고, 소는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탈출 21,32)는 말대로 소에 받혀 죽은 종의 값으로 치는 은 30 세켈을 받고서 팔아치웁니다.

  또 마지막에 가서는 자신을 스스로 단죄하였습니다. 자신이 심판관이 됨으로 주님께서 용서해 주실 기회마저 없애 버렸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며 아낄 줄 모르고, 자포자기하는 것도 죄가 된다고 복음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긴 유다는 실은 매우 어리석었습니다. 자신의 적극적 협조가 없어도 사람의 아들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수난 받고 죽으시라는 것을 전혀 모른 것입니다. 그의 그런 행동은 인간의 부끄러움만 더한 셈이었습니다. 아멘.               주님 죄인을 돌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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