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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여기에 쓰레기를 버린 그는 누구일까?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07-04-05 조회수577 추천수7 반대(0) 신고

 

        쓰레기통조차 없는 일본, 그들 보며 슬픔 느껴 
                소소한 것들에 대한 슬픔과 절망 속에서 
      





▲ 호수 같은 아늑하고 아름다운 바다 '장명수' 해변에 버려진 건축물 철거 쓰레기더미. 지난 3월 8일 찍은 사진이다.  
ⓒ 지요하

가끔 아파트 관리사무소의 방송을 듣는다. 그 방송 중에는 아파트 창문 밖으로 담배꽁초를 버리지 말아달라는 얘기도 있다. 단순한 공지사항이 아니라 간곡한 부탁이다.

"담배꽁초 투척은 이웃 주민에게 피해를 주고 화재가 발생할 위험이 있으니 꼭 좀 자제해 주십시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묘한 의문에 사로잡히곤 한다. 이런 새 아파트에 사는 사람 중에도 창 밖으로 담배꽁초를 버리는 사람이 있다니! 그는 습관적으로,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런 짓을 하는 걸까? 아니면 자신의 행위를 잘 인지하면서 그런 짓을 하는 걸까? 고의적으로 그런 짓을 한다면, 그 '고의(故意)'는 도대체 무슨 마음일까? 그는 어떤 마음보를 가지고, 어떤 모양새로 세상을 사는 사람일까? 물론 쓸데없는 의문들이다.

종종 엘리베이터 안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본다. 담배꽁초는 아파트 로비에도 있고, 화단이나 주차장에도 있다. 빈 갑이 나뒹구는 경우도 있다. 주민이 한 짓인지, 중국음식점 배달원이 한 짓인지 현관 바로 앞 하수구에 밀가루 음식이 버려지는 때도 있다.

담배꽁초나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는 사람들과 한 공간에서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이 서글프게 느껴진다. 부지런히 청소를 해주시는 분들을 도와드릴 겸 오가는 길에 아파트 마당의 오물들을 주우면서, 이런 걸 버리는 사람과 줍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이며 어디에서 오는 걸까? 또 한번 괜한 의문을 삼키기도 한다.

단란한 가족 소풍, 마무리도 깔끔해야

언젠가 한번은 태안읍 도내리 해변에서 걷기 운동을 할 때 바다와 저수지 사이의 제방 한 곳에 앉아 있는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보았다. 젊은 아빠와 엄마, 초등학생과 유치원생쯤으로 보이는 여자아이와 남자아이, 정말 '공평'하고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어른들은 맥주를 마시고 아이들은 음료수와 과자를 먹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상한 '호기심과 걱정' 때문에 멀리는 가지 못하고 가까운 지점을 거듭 왕복하는 식으로 걷기 운동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저만치에서 그들 가족이 승용차에 올라 떠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들 가족이 있던 곳을 향해 잰걸음을 하다가 뜀박질을 했다.

그들 가족이 있던 자리, 제방 턱에는 빈 맥주병과 음료수캔, 종이컵과 비닐봉지들이 그대로 있었다. 나는 그들이 타고 가는 흰색 승용차의 꽁무니를 망연히 바라보며 가슴을 쳤다. 내가 좀더 일찍 되돌아오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 그들을 붙잡지 못한 것이 그렇게 억울할 수 없었다. 그 젊은 아빠와 엄마는 아이들에게 도대체 무엇을 가르치며 살까? 그들이 평생 동안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뭘까?

그날 따라 도내리 저수지 주변의 숱한 쓰레기더미들과 수많은 낚시꾼들이 더욱 밉게 보였다. 오늘도 이곳에 와서 낚시로 세월을 즐기는 저 인간은 쓰레기를 만들어서 고스란히 놓고 가는 부류일까? 아니면 의외로 자신의 쓰레기를 모두 되가져 가는 드문 '사람'일까? 그런 쓸데없는 의문 때문에 더욱 마음이 무거웠다.

또 언젠가 한번은 천안의 한 대학교를 간 적이 있다. 그 학교에서 무용을 가르치는 여교수를 만나 인터뷰를 해야 하는 일 때문이었다. 교정의 주차장 옆, 건물이 만들어주는 넓은 그늘에 둘러앉아 커피와 음료수를 마시는 네댓 명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의 모습에서 지성과 낭만, 자유분방함의 낌새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런데 교수의 연구실에서 대담을 마치고 나와 보니, 그 학생들이 앉아 있던 자리에 빈 깡통들과 담배꽁초들이 그대로 있었다. 나는 두 다리에서 기운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들 대학생들에게 과연 '자각의 문'이 존재할까? 자각의 문이 존재한다면 과연 언제쯤 열리게 될까?

얼마 전 아내와 함께 또 한번 내 차를 가지고 서울을 갔다. 대학교 기숙사를 나와 상도동 이모 집에서 살게 된 딸아이에게 몇 가지 소소한 물품들을 가져다주는 일 때문이었다. 어느 큰길에서 신호를 받을 때였다. 양쪽에서 수십 명이 길을 건너가는데,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한 여자아이가 플라스틱으로 된 아이스크림 빈 통을 길에 버리더니 그것을 발로 찼다. 길 가운데로 굴러가는 그것을 여러 사람들이 보았지만, 그것을 줍는 사람이나 그 여학생을 나무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 여학생보다도, 그 여학생의 철없는 행동을 나무라는 사람이나 그 쓰레기를 줍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사실에서 막막한 슬픔을 느꼈다. 정말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쓰레기를 버릴 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거의 매일같이 장명수 해변으로 걷기 운동을 한다(진달래 등 봄꽃들을 보기 위해 요즘엔 다시 한시적으로 백화산을 오르지만…). 호수 같은 장명수 해변에서 고향에 대한 질감이며, 내 소년 시절 추억들이며, 선친의 소년 시절 일화들이며, 수많은 상념들을 얻는다.

그러다가 지난 3월 어느 날, 근흥면 안기리 해변에 무더기로 버려진 쓰레기를 보게 되었다. 트럭으로 실어다 버린, 함석 쪼가리 플라스틱 쪼가리 등 건축물 철거 쓰레기였다.

나는 그 쓰레기더미를 발견한 순간 심한 충격 때문에 다리가 떨렸다. 오랫동안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여기에 이 쓰레기를 버린 인간은 누구일까? 그는 무슨 마음보를 갖고 사는 사람일까? 여기에 이 쓰레기를 버릴 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만 볼 줄 알고, 저 바닷물과 하늘은 볼 줄 모르는 눈먼 사람일까? 그렇게 눈먼 사람이기에 누가 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바닷물은 인간의 쓰레기를 거부한다. 사리 때는 한사코 날마다 해변 끝으로 밀어내는 일을 계속한다. 그리하여 쓰레기들은 넓게 흩어져서 더욱 지저분한 풍경을 만든다.

나는 그 쓰레기들을 보면서 괜히 일본을 떠올린다. 지난해 여름에는 큐슈를, 가을에는 동경을 가보았다. 아소산 국립공원에서도, 후쿠오카와 도쿄의 거리들에서도 쓰레기통을 볼 수 없었다. 쓰레기는 물론이고 쓰레기통조차 볼 수 없는 환경에서 나는 이상한 슬픔과 절망을 느꼈다. 일본의 그 숨막힐 듯한 청결은, 일본인들의 침략근성과 묘한 대비를 이루면서 내게 야릇한 열패감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나는 오늘도 장명수 해변을 걸으면서 숱한 쓰레기들을 보며(이웃나라 일본도 떠올리면서) 뼈아픈 슬픔에 젖는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충남 태안의 <태안신문> 4월 5일치 '태안칼럼' 난에 게재된 글입니다.


  2007-04-05 10:36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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