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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4-10 조회수815 추천수7 반대(0) 신고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시니, 마리아는 돌아서서 “라뿌니!” 하고 불렀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요한 20,11-18)



  요한복음서는 영광의 신학을 주제로 이야기 하는 복음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아주 비중 있게 다루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주 깊은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가 말하는 예수님의 부활을 잘 깨닫기 위해서 이 대목의 묵상이 무척 중요합니다. 요한 저자의 의도를 낱낱이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빈 무덤에 대한 증언이 두 사람의 남자의 증언으로 이루어집니다. 바로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입니다. 그들은 빈 무덤을 보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자들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그러나 두 제자는 아직까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모습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합니다. 모든 것을 분명히 깨닫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20,9)


  마리아만 무덤에 남아 당황스러운 이 상황을 어쩔 줄 몰라 울고 있습니다. 혹시나 재차 빈 무덤을 확인 하고 싶은 마음에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봅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애달픈 여인의 심정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주체 할 수 없는 슬픔에 예수님의 시신마저 잃어 버렸다는 안타까움까지 겹쳤습니다.

  그녀는 놀랍게도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를 목격합니다. 천사는 하느님의 일을 수행하는 직분을 갖고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천사가 나타나는 것은 인간으로서 잘 모르겠지만 하느님의 개입이 진행 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마리아는 몸을 돌려 무덤 바깥을 보았을 때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20,14)고 쓰여 있습니다.


  복음서 저자가 마리아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요한 11,5) 라고 적었습니다.

  또 예수께서 죽은 라자로를 소생시켜 주셨습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 (11,43-44)

  마리아는 예수님께 최고의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12,3)


  그런 마리아가 예수님을 뵙고도 한눈에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적은 것은 무엇인가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관계라면 멀리서 풍겨나오는 향기 만으로도 곁에 있다고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예수님인 줄 몰랐습니다. 그 까닭은 부활하신 예수님은 육신과 영혼을 모두 가지신 분이지만 생전에 마리아가 알던 그런 존재와는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마리아가 발을 붙잡을 수 있는 몸을 지니셨지만, 무엇인가 변모를 일으키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분이 아니라 과거의 예수님, 돌아가신 예수님만을 찾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하고 이름을 부르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되어서야  그녀는 예수님을 알아 봅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이름을 부르시고 계셨는데 그녀는 자기 감정에만 치우쳐서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계신 주님을 깨달을 때야 주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소생의 의미와 부활의 의미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죽은 라자로를 소생시켜 주셨습니다. 소생한 그 라자로를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처음부터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되살아난 전과 후가 똑 같은 존재 양식을 지녔습니다. 한마디로 소생한 라자로는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기 전과 후의 존재 양식이 다른 분이셨습니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셨습니다.  다시는 죽지 않으시는 분으로 변용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며 죽음의 세력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존재가 되셨습니다. (헤르만 헨드릭 著, 예수 부활 이야기. 가톨릭출판사. 1985년. P205 참조)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20,17)

 

  우리는 이 선언도 깊이 묵상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나름대로 상상하여 우리 편의대로 믿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하여야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매달린 분은 과거의 예수님이 아니라 이제 아버지께 올라가셔야 할 분이십니다. 과거에만 머물려야 하실 분이 더 이상 아닙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16,7)


  과거의 예수를 상정하고 그에 따라 내게 익숙한 예수님만을 고집한다면 새 보호자 성령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생각했던 예수 상에만 머무른다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아니 왜곡된 신앙으로 빠질 수 있습니다. 내게 도움을 주셨던 분, 내가 필요했을 때 나타나시는 분으로만 찾는다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부활시기를 맞아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과거의 내가 아니라 새로운 실존으로 거듭 나아가야 한다는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단순한 소생 차원에 머무른다면 참된 부활에 이르기 어려울 것입니다. 제가 겪어야 할 십자가를 통해 자기를 죽여 없애는 것이야말로 참된 부활에 이르는 길이라는 점을 확고하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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