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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빈수레글
작성자김미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7-04-10 조회수869 추천수0 반대(0) 신고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오늘의 말씀

 

 

                          부활 팔일 축제 내 화요일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 할 때 가장 주목되는 인물이 있다. 바로 막달라 여자 마리아다.

본디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일곱 마귀’에 사로잡혀 있다가 예수님의 도움으로 치유 받은 여인이었다. (마르 16, 9 )이름이 마리아였던 이 여인을 사람들은 출신 고장이 ‘막달라’ 라고 해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라고 불렀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열두 제자와 함께 예수를 따라다녔던 갈릴레아 출신 여자들의 일행 가운데 하나였다. 이들은 대부분이 “악령이나 질병으로 시달리다가 나은 여자들” (루가 8, 2) 이었다. 숙명처럼 병마에 시달리다가 예수님을 만나 비로소 사람다운 삶을 살게 된 이들은 그 벅찬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의 일행을 돕고 있었던” (루가 8, 3) 것이다.


남녀의 상종이 철저히 금지되었던 시절에 여자들은 일행에 끼워 데리고 다닌다는 것은 자유인(自由人) 예수님이 아니고는 누구도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남자는 자기 부인과도 될 수 있는 대로 말을 삼가는 것이 관습이었다고 하니, 이는 분명 상식과 전통을 깨는 일이었다. 그러기에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발탁하셨던 것은 이들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연상시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모두가 당연히 남자들이었다. 하지만 이 조건이 충족되고 난 다음의 조직적인 선택은 그야말로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 주변에 갈릴레아 출신 여자들 여럿이 일행을 이루도록 하셨던 것이다.

이 여자들 가운데 리더가 바로 막달라 여자 마리아였다.

그러니까 그녀는 열세 번째 제자였던 셈이다. 혼자서가 아니라 다른 여자들과 함께 열세 번째 제자로서 예수를 동행하였던 것이다. 서열(序列) 열세 번째가 아니라 당당히 ‘열세 제자단’ 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확실히 예수님은 사고를 치셨다. 사고도 보통 사고가 아니었다.

남성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고 있던 시절에 인류 역사 ‘최대의 사건’인 부활의 사실을 한낱 여자(토착화 된 표현을 쓴다면 ‘계집’이 더 맞을 것이다.) 에 불과한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최초로 알렸다는 사실은 분명 파격이었다. 제자단이 당황했을 것은 물론이다. 당황을 넘어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을 것도 자명하다.

이 정도면 이제 세간에서 ‘스캔들’ 성 루머가 퍼져도 변명이 궁색할 수밖에 없는 트집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때가 어떤 때였던가. 여자가 남자의 재산목록 1호로 여겨질 만큼 물건 취급을 당하던 시절. 사람 숫자를 헤아릴 때 여자는 쪽 빼놨던 시절, 공석에서 여자에게 발언권도 주지 않았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발현을 첫 번째로 목격하는 영광을 여자인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누리게 하셨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가서 전하라고 명하셨다. (요한 20,11-18)


왜 그러셨을까? 여성 해방이나 여권 신장을 위한 본(本)을 남기기 위해 일부러 그러셨을까?

아니면<예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는 영화의 추리처럼 예수께서 그녀를 편애하셨기 때문에 그러셨을까? 추측만 무성할 뿐, 쉽사리 답이 얻어지지 않는 물음들이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들이 비어있는 무덤 앞에서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묻는다.

“여인아, 왜 우느냐?”

이에 마리아는 대답한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어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물으신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이에 마리아는 그분이 정원지기인 줄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가겠습니다.” 하고 말한다.


주님의 부활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마리아는, 지금 예수님의 시신에 온통 마음이 가있다. 한마디 한마디가 평소 주님을 향해 마리아가 가지고 있던 애정이 묻어난다.


하느님을 만났을 때 과연 “나는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즐거워할 수 있을까? 아니면 하느님을 피해서 도망가려고 할 것인가? 나는 제대로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위로해 주신다. 죽음 앞에서 울고 있는 우리에게, 두려워하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위로를 주신다. 슬픔을 이겨내는 것,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하는 것, 그것이 나의 믿음 안에서 자리 잡고 있는 부활 신앙이 아닐까.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요한 20,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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