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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말씀과의 만남: 루카 24장 13절-35절,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4월 11일 복음 독서)
작성자박순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7-04-12 조회수943 추천수1 반대(0) 신고
 

+주님 부활을 경축하며 또한 일상의 삶 속에서의 형제 자매님들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성경말씀을 직접 우리가 함께 읽고 싶은 마음에서 이 성경 독서를 올립니다. 이 독서는 기호학적 성경 독서 방법을 주로 적용할 것인데,  우리의 이 방법은 <거룩한 독서>에서의 관찰과 묵상 부분에 해당될 수 있을 것입니다.

 

루카24,13-35: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13바로 그날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그들은 그 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 하였다. 15그렇게 이야기 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7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주고 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18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19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지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 셨습니다. 20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21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22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24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꿈뜨냐? 26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28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 하였다. 29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30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주셨다. 31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사라지셨다. 32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33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모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35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이 이야기는 예스님의 부활을 체험하는 사화 중의 한 토막이다. 무덤 속의 예수님의 부채를 확인한 동료들의 말과 “그분은 살아계시다”는 천사의 증언을 전하는 여인들의 말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두 제자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면서 증언자로 변모해가는 이야기입니다다. 곧 그들의 신앙적 부활을 다루고 있는 이야기 입니다.

        이야기의 구성은 크게 나누어 보면 긴 부분을 차지하는 말씀의 부분(16절-27절)과 단 3절의 짧은 부분이긴 하지만 대단원을 이루는 성찬의 부분(30절-31절)과 파견의 성격을 띄는 마지막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완벽한 미사성제를 보여줍니다. 그러면 세밀한 관찰을 통해 읽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관찰

        관찰에 있어서는 편리상 시간과 공간과 인물들로 나누어 살펴보겠으며, 그리고 관찰의 끝에 가서 이 셋을 함께 연결하여 해석할 것입니다. 


1.1. 시간

        이야기는 마침 그들 중 두 사람이 “그날” 엠마오라는 동네로 걸어가고 있었다 (13절)로 시작하여 “저녁때가 되어가고” (29절) 예수님과 함께 집에 도착하여 식사를 시작하면서 빵을 드시고 사례하신 후 빵을 떼어주시자 그때에 비로소 그분을 알아보고(31절), “곧 바로” (“바로 그 시간에”: 정양모역, 1984, 200주년 신약성서 3)일어나(33절) 다른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는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서 그들의 예수님 부활 체험을 전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간의 행보는 (시간과 관련된 표현들과 그 연속적안 흐름 또는 변화) “바로 그날” (사흘째 되는 날) --> “저녁때가 되어 가고” --> “바로 그 시간에”로 이어지는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당일, 그 하루 안에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들은 여러 날로 나누어지는 날이 아닌. 하나의 날입니다.


1.2. 공간

        인물들의 공간 이동을 보면 <예루살렘> --> <엠마오> --> <예루살렘>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곧  공간적 이동은 두 제자들의 예루살렘으로부터의 분리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의 복귀로 나타나는데, 이는 예루살렘에서 다른 제자들 곧 동료들과 함께 있었던 공동체로부터 스스로 분리되어 나왔다가 다시 그 공동체로 복귀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변화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하는 체험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이 공간적인 행보와 인물들의 행보가 어떤 관계 안에서 진전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3. 인물

        등장인물들은 두 제자와 예수 그리고 열한 제자들입니다. 이들의 행보(행동들의 흐름 또는 변화)들은 두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다섯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첫 단계14절-15절):  사건 속에 갇힌 두 제자, 사건에 관해, 사건에만 집착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토론하며 길을 가는 두 제자

        토론의 내용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답(19절-24절)에서 추측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보고 알고 있는 사건 내용의 나열과 되풀이 입니다. 곧 그들이 본 사실에 근거한 지식(앎)의 나열입니다. 그들은 보고 알고 있는 표면적 사건의 내용만을 되풀이 이야기하면서 사건 안에서만 맴돌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토론은 결론 없이 동일한 내용만 되풀이하고 있었는 듯 합니다. 그들은 현실적 사건 속에 갇혀서 신앙의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눈이 가리워져서 그분은 알아보지 못하는(16절)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들은 사건 안에서만 맴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 예수님의 개입이 있습니다만,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둘째 단계(16절-17절): 전환을 위한 멈춤, 예수님의 황당한 질문에 멈추어서는 두 제자와 예수님 

        “걸어가면서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너무나 상식적인 것에 대해서 질문하는 자의 너무나 비상식적인 황당한 질문에 두 사람은 침통한 표정으로 멈추어 섭니다. 그들이 가는 길을 멈추어 섰다는 것은, 길을 가기 위해 발을 옮기는 작업을 되풀이 하는 것과 같은 얘기를 되풀이 하던 것을 일단 멈추는 것이 됩니다. 곧 되풀이하던 그 어떤 것을  정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던 길에서 일단 멈추어선 일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건 안에 갇혀 맴돌고 있을 때 그들을 그 사건 밖으로 끌어내기 위한 첫 단계는 일단 그들의 맴돌이를 정지시키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맴돌고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일단 정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멈추어 서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어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황당한 질문과 그러한 질문을 한 사람을 무시하고 계속 그들이 알고 있는 것만을 고집하며 그들의 길을 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대화의 단절을 야기하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질문을 받고 일단 멈추어서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상세히 얘기해 줍니다. 그들이 멈추어 선 것은 이 귀찮은 어이없는 질문자를 쫓아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에게 응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타인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며 대화의 지속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들은 멈추어 서서 그 사건을 진지하게 질문자에게 이야기하고 난 후 그 타자의 말을 경청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한 타자인 예수와 마음으로의 통교를 가져오게 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서로 말하기를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32절). 그러면서 그들은 사건을 바깥에서 조명해볼 여유를 갖게될 것이고 점점 발전적으로 그 사건의 진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드디어 그 나그네를 자신들이 묵는 집으로 초대하여 묵어가게 합니다. 자기 생각이나 아집, 집착되어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잠시 정지하고 먼저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 셋째 단계(25절-27절. 32절): 마음으로의 만남, 예수님의 성경 해석 (성경 안에서 예수와 관련된 이야기를 설명)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할 것은 사건과 예수님에 대해서 갖는 두 제자의 관점과 예수님의 관점의 차이입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라는 인물은 현실적인 한 사건 안에서만 볼 뿐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스승이었던 예수님의 정체는 1. 나자렛 사람 예수 (20절), 2. 대 예언자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대 예언자셨습니다”. 20절 ), 3.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 (21절), 4.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처형된 자 (자신들의 기대에 어긋난 자, 20절).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예언자들은 비롯하여 성경 전체에서 당신을 설명, 사건을 성경 안에서 해석하고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증거하십니다. 대제관들과 지도자들이 넘겨주어 십자기 형으로 사형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가 겪어야할 당연한 고통, 그러나 이 고난을 통해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임을 함께 설명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은 현실을 말씀 안에서 봐야하는 것임을 일깨우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 넷째 단계(30절-31절): 식탁에서의 예수님과 두 제자: 예수님을 인식

        “빵을 드시고 찬양하신 다음 떼어 그들에게 주시게 되었다.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리어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마음이 열리게 하고(32절), 성찬례는 그들의 눈이 열리게 합니다(31절). 나자렛 예수라는 인물의 현실적 사건을 성경으로 조명하여 보여준 후 예수님은 성찬례를 통해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이는 말씀이 성찬례 안에서 구체화됨을 보여줍니다. 눈이 열림이 마음의 열림 다음에 이루어졌음에 유의해야할 것입니다.


        - 다섯째 단계 (33절-35)절: 예루살렘으로의 귀한: 증언자로, 선포자로서 공동체로의 복귀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은 곧 공동체로의 복귀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복귀가 아니며, 흩어지지 전과 같은 정체성을 잃은 공동체가 아닙니다. 예수님 부활에 대한 증언을 중심으로 모여진,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이 증언되고 확신되기 시작한  공동체입니다: <<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하고 말하고 있었다>> (34절). 부활 신앙의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제자 역시 거기서 예수님 부활 체험을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다루면서, 또한 두 제자의 신앙적 부활과 공동체의 부활을 얘기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2. 묵상

        위에서 관찰하면서 묵상이 병행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는 다만 결론삼아 시간들의 요소들이 공통적으로 나타내는 의미와 관련하여 간단히 묵상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시간 행보를 관찰하면서 이 이야기 안에서 얘기되는 시간들이 여러 날로 나누어지는 날이 아닌 하나의 날임을 보았습니다. 곧 이 이야기에서 얘기되는 시간들은 <하나> 안에 있는 여러 시간적 요소들입니다. 여러 가지가 <하나> 안에 포함되는 형상입니다.

        이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를 서로 따로 따로 떼어서도 어느 하나를 경시하거나 더 중요시해서도 안되는, 그 둘로써 비로소 완전한 하나의 미사성제가 완성된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 사실은 또한 우리의 일상을 살아가는 길 안에서의 미사성제를 생활화하는 규범이 됨을 일깨우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곧 말씀 읽기와 빵을 나눔의 실천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이라는 부정적인 현실의 사건이 성경 말씀에의 조명과 빵을 떼어 나누어 주는 예수님의 행위 안에서 긍정적이고 희망을 주는 새로운 의미로 부활하듯이, 우리 일상의 일들이나 사건들 역시 그 사건으로서만 이해하고 해결하려고 그 안에서만 맴돌 것이 아니라, 말씀을 받아들여(제자들이 예수님의 설명에 귀 기우렸듯이) 그 안에서 깨닫는 마음의 반전이 있어야할 것입니다. 이 것은 나눔과 부활에로 이르는 걸음마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일상사, 성경 말씀 읽기, 나눔, 부활이 모두 하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 다듬어지지 않은 글 끝까지 함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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