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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니가 부활을 알어 / 이인주 신부님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4-13 조회수1,064 추천수12 반대(0) 신고

니가 부활을 알어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은 조용한 사건이었다. 그러면 왜 조용히 다가오시는가? 물었더니, 내 맘이지, 농담이고요, “내 생각은 당신들 생각과 다르기에 그렇고, 나의 길은 당신들의 길과 역시 다르기에 그렇게 온다오.....”

여기에서 부활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에 대한 소견은 개인적인 것이기에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다만, 불꽃, 갈대바람의 신비 속에서 생명의 혼이 살아남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려면 그만큼 큰 신앙이 요구된다고 본다. 어떤 신앙 부활의 장면을 보여주실 때 까지 저는 절대로 당신 곁을 떠날 수 없다는 그런 결단의 믿음 말이다.

이냐시오 성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나타나신 사건을 보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아주 은은하게 성모님께 다가가셨다, 비유로 말한다면, 마치 옹달샘과 같았다. 옹달샘이 퐁퐁 올라와서 서서히 주변의 땅을 스며들어 적시듯이 부활사건은 그런 모습이다. 부활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흘러나오는 옹달샘의 향기가 바로 평화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조용히 느끼고 나면, 어느 샌가 평화가 기쁨으로 다가와 있음을 느끼면서 알렐루야 하고 찬미할 수 있는 모습이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성모님께 드린 엄청난 선물이었다. 성모님은 바로 위로가 되셨고, 그로 인해 예수님의 신성이 드러난 대목이다. 단단하게 효자역할 하신 예수님이시다. 그 외에도 처져 있는 제자들에게도 엄청난 충격적인 선물이었다. 마치 오함마로 뒤통수 맞고도 쓰러지지 않고 맑은 정신이 든 사건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다시금 자신들의 신원을 확인, 확신 시켜주신 사건이었다. 특히 제자들에겐 사도로써 활동하는 근간이 되게 한 사건이다. 더더욱, 토마의 경우는 확인사살 하듯이 온전히 다 보여주시면서 확인시킨 사건이다. 이로써 더 이상 죽음은 죽음이 아님을 증명한 사건이 되었다.

부활 사건은 누구에게나 같은 모습이 아니다. 보는 사람의 시각, 시간에 따라 모두 달랐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경우 옆에 계셔도 몰랐고, 이름을 불렀을 때야 비로써 라뽀니 하고 응답한 것을 봐서도 그렇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도 빵을 뗄 떼야 겨우 알아챘다. 그것은 공생활 때의 예수님과 완연하게 달랐다는 것이다. 그럼 무엇이 달랐는가? 부활하신 예수님은 확연하게 신성을 지니셨다는 점이다. 신학자 오스카 폴만은, “역사상의 예수와 신앙의 예수는 부활 때부터 다른 모습으로 보여 졌다는 것이다.”

기다려 보라. 기도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떻게 보이는 가를? 그런 가운데 심리적으로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다시금 무덤가에서 기다려 보라. 토마스가 못 봤던 것. 왜 그랬는가도, 다시 보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승리자나, 시끄럽게 오시는 그런 분으로 보면 잘 안 보인다.

부활은 정말 큰 사건이다. 지금까지 있던 일들이 완전히 없어질 수도 있고, 천지개벽을 하듯이 새롭게 모든 것이 평가될 수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볼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보여 진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기적이 일어났던 시기의 대부분은 신앙이 있어 예수님을 따르고 신뢰하는 그 카테고리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단, 예수님이 공생활을 마감하고, 체포되는 그 순간부터 부활까지는 참 인간적인 모습만 보였기에, 그때는 어떤 사람이든 보고자 하는 사람은 그의 행적을 다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부활이란?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에 의해서 새롭게 각인 된 새로운 삶의 관점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새로운 삶의 관점이 되었다는 것인가?

죽었다 다시 살아난 예수님을 만난 사건하나만으로도 새로운 모습의 삶이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삶의 질이 완전히 바뀌어 있다는 점이다. 도망치고, 두렵고, 아예 실망하여 낙향하고.... 그랬던 사람들이 빈 무덤이 확인되면서부터 처음엔 도깨비에 홀린 듯  난리 더니, 드디어 그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과 함께 확인이 되는 순간부터 자신들의 삶이 완전히 변화 된 것이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도 되었고, 실망이나 낙향할 일도 없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나눠주었던 양식을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는 순간부터 크게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살아가고 있었다. 이것이 부활사건의 새로운 모습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있어서 부활은 바로,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이 변화되어 산 것처럼 살 때 비로써 그리스도교 신자로서의 삶을 다 사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모든 정성을 다해서 그분의 부활을 기다렸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부활을 고대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부정적으로 보면, 고난의 시간의 빨리 끝남을 위해서, 절제의 생활이 힘들어서, 약속을 다 지키기 위해서, 술 마시고 싶어서, 인터넷 많이 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우린 그분과의 약속이 있으면 열심히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부활을 기다린 것은, 그분을 새로운 장에서의 만남이고,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으로부터의 어둠에서 영원한 생명의 빛으로의 희망을 우리에게 큰 선물로 주셨기에 그분의 부활을 기다린 것입니다.

큰 깨달음이 있는 사람 외엔, 사람이면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라는 놈의 생리를 잘 알고 나면, 그렇게 두려웠던 죽음의 공포도 더 이상 우리를 두렵게 하지 못함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은총의 선물인 것입니다.

사순절과 성주간을 다 지내가며 막바지에 부활미사를 준비하면서 조용히 성당 뜰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때 웬 예쁘장하신 자매 한 분이 오셔서, 신부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백성사입니까 하니, 아닙니다. 좋은 마음으로 상의 드릴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좋다니. 사실 진작부터 신부님을 아는 신자입니다. 어디 좀 봅시다. 신부 과거케는 그런 사람은 아니겠지요. 겁내지 마세유. 뭔 발치에서만 보던 교유이니까요. (마세유 하는 걸 봐서는 사람 잡는 그런 교유는 아니겠네요. 멍청도 이시구먼....... 그래서 한번 웃었다.)

이야기인즉, 수녀원엘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때 대뜸 올해 몇인데요? 좀 많습니다. 그래서 신부님께 부탁드릴 겸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허 어쩌나 신부가 수녀님들께 빽스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좌우간 이야길 들어봅시다. 신부님 전에는 제가 더 예뻤다고요. 젤뚜르다 기억하세요. 아! 가구공장 큰 딸, 그래 큰 딸이 예뻤었지. 그런데 그럼 당신이 젤뚜르다? 예 맞아요. 그래 아버님은 잘 계시나, 가구공장은 잘 되고, 웬걸요. 공장에 불이 나서 아빠는 벌써 하느님 품에 가셨고요. 동생은 좀 덜 예쁘다는 이유로 먼저 수녀원에 가서 잘 살고 있답니다. 그런데 저는 화재 때 화상을 입어서 엉망이 되었는데, 몇 년에 걸쳐 성형수술을 받고 이정도 회복이 되었답니다.

그래 이번 사순 기간엔 많은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했답니다. 그 이유는 점점 더 살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기는 것 있잖아요. 그러던 어느 날 성체 앞에서 밤 세우는 줄 모르고 기도했는데,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젤뚜르다 그 몸과 영혼이 뭐 네 건 줄 아느냐? 절대 그렇지 않단다. 나도 이렇게 생 몸을 바쳐 이렇게 부활하고 있잖니........ 그래 이제부턴 외모 생각 말고 주님께 몽땅 봉헌해라. 주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더 이상 죽음은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어왔고요, 영원히 사는 나인데 왜 죽음과 삶을 구분하는가 하는 나름대로의 깨달음이 찾아들었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삶의 연장이 죽음이요. 죽음 이후엔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음을 확신에 차서 사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답니다. 신부님 제 생각이 맞지요? 그럼 맞고말고요........

왜 신부님이 신부님 되시기 전에, 저와 제 동생과 대화중에, 제 동생이 이렇게 질문한 것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어째서 똑같은 엄마 아빠 뱃속에서 나왔는데 언니는 저보다 더 예쁜 거예요? 그때 신부님이 뭐라 대답하셨는지 기억나세요? 글쎄 고민스러워 하는데, 뭐라 했기에, 아야 뉘도 벌써 쪼끄만 것이 벌써 시기 질투 하냐? 그러면서 이런 이야길 들려 주셨어요.

옛날에 두 자매가 살았단다. “언니는 예뻐서 남자들에게 인기가 있다 보니, 매일 노래하고 술 마시고, 춤추고, 담배피우고, 그 다음은 나도 몰라....... 그런데 동생은 좀 빠져서 죽어라 기도와 공부만 하다 보니 범생이었지.” 그러던 어느 날 사순절이 왔고, 판공성사를 봐야하는데 거기 본당 신부님이 괴짜라서, 자신이 고백성사를 안 듣고, 양심 저울을 하나 설치해 놓고 거기에 올라가라는 것이었어요.

동생은 얼마 전에 성사를 받고 죄가 거의 없는 터라, 씩씩하게 저울에 올라갔지요, 저울이 하는 말, 음! 좋아. 마음이 예쁘군. 그런데 그 이쁜게 대수야 그 콤플렉스를 벗어 던지라고, 그래서 저울 아래로 기쁘게 내려왔답니다.

이제는 언니 차례입니다. 예쁜 언니는 용기가 안 나서, 저울에 억지로 올라갔습니다. 저울 화면과 동시에 들리는 소리, 예쁘긴 예쁘구먼, 그렇치용 하고 기뻐한다. 그다음 들리는 말, 그런데 속이 어째 그리 시커먼 거야, 어이쿠 들통 났네, 마치 시커먼 걸레 같구먼.
그랬더니 젤뚜르다 왈! 걸레라고요. 그럼 하얗게 될 때까지 빨면 되잖아요. 그래 하이타이, 퐁퐁, 강력세제, 양잿물, 표백제 다 동원해서 하얗게 해 가지고 가서 재도전을 합니다.

다시 양심의 저울에 올라간 언니, 가슴이 두 근 반 세근 반합니다. 저울의 화면을 보니, 음! 빨긴 빨았구먼, 그러나 걸레는 빨아도 걸레라는 걸 모르나....... 약간 고개 떨구는 젤뚜르다. 그 모습을 안 놓치고 다가가서 어깨를 두 두려 주시는 부활하신 예수님.......

그렇습니다. 그래도 우린 실망하지 말아야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예쁜 얼굴이나 옷 보다, 잘 가꾸어진 마음을 더 사랑하니까요. 인간은 어차피 죄인이고 걸레입니다. 그러나 깨끗한 걸레와 지저분한 걸레는 분명 다릅니다. 늘 깨끗한 걸레로 남기를 바랍니다. 예! 걸레면 좀 어떻습니까? 또 저처럼 못 생겼으면 어떻습니까? 중요한 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내가 변화되어 기쁘면 되는 것입니다.

부활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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