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말씀과의 만남:요한복음20,19-31 (2부)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과 토마스,부활 2주일 복음
작성자박순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7-04-16 조회수807 추천수0 반대(0) 신고
 

부활 2주일 복음: 요한 20,19-31


텍스트: “성경”,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 2005

*1부의 19절-23절에 이어지는 복음읽기 입니다. 먼저 1부를 읽어주세요. ^^ 

 

24열 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하고 말하였다. 26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그러자 예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토마스 사도는 다른 동료들(단수가 아닌 복수임에 유의)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고 하는 말을 믿지 않고, 십자가 처형의 흔적을 지닌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져 보지 않고서는 결코 믿을 없다고 고집합니다. 토마스의 행동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를 거부하기 보다는 동료들의 말을 듣는 것과 믿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들을 귀를 잠그고 있는 셈입니다. 이는 ‘내가 보아야 하고 내가 만져봐야 하고 내가 믿어야하며, 너희들이 아니라 내가 해야 돼’라는 자기 영웅심의 표출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야기에서 제자들이 두려움 속에 갇혀있었다면 토마스는 지금 자기 고집 속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여드레 예수님이 토마스와 함께 있는 제자들에게 같은 방법으로 나타나서, 제자들 한가운데 서시며 “여러분에게 평화”라고 말씀하신 , 토마스에게 당신의 십자가 상처들을 보고 만져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토마스는 즉시 “저의 주님, 저 하느님(28절) ”이라는 신앙 고백을 합니다. 토마스의 고백을 통해 다른 제자들의 믿음 상태가 토마스보다 열악함을 엿볼 있습니다. 이야기에서 그들이 부활하신 스승 예수님을 직접 보고 성령을 받고 파견 명령까지 받고서도 여전히 문을 잠그고 모여서 움직일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중증입니다. 예수님의 파워 풀한 세 번 째 인공호흡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숨만 쉬고 있었지 스승 예수님의 파견 말씀을 이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듯 합니다. 움직일 조짐이 안보입니다. 아직은 무엇인가가 2 % 부족합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확실한 <신앙고백>입니다. 이 사명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부활하신 분을 보고 기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토마스가 것처럼 “저의 주님, 저 하느님”이라는 절대적인 신앙 고백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그리고 예수님은 토마스가 이른 이 믿음의 길 보다 복된, 아마도 더 성숙한  믿음의 길로 제자들을 초대하십니다. “보지 않고서 믿는 이들은 복됩니다!(29)


바로 여기서, 처음에 던졌던 질문: ‘왜 예수님은 동료들의 말을 믿지 않는 토마스에게만 발현하지 않으시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는 토마스에게 나타나셨을까’의 답을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2.묵상


우리는 추측할 수 있는 이 답과  관련하여 이 독서의 결론겸 묵상을 하겠습니다.  이는 곧 부활한 예수님을 믿고 고백하는 것, 신앙주체가 되어야하는 것 토마스 만의 문제가 아니라 제자들 모두의 문제임을 보여주고 있다 할 것입니다. 토마스의 부족함을 통해 믿음의 정수에로 다른 제자들을 이끄시는 예수님. 보지 않고 믿는 믿음, 그것은 또한 <듣기>에로의 초대입니다.

우리가 듣는 것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입니다. <말씀에로의 초대>를 말합니다. 귀와 마음의 빗장을 열고서 말씀을 경청하는(읽는) . 그것은 안도의 기쁨을 넘어 “저의 주님 하느님 !”을 고백하는 신앙주체에로 이르는 길 아니겠습니까? 요한 사도의 말씀을 빌리자면 바로 이것이 “영생”인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참되시고 오직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 17,3). 따라서 말씀 듣기는 <영생>으로의 초대인 것입니다.

맺음말에서는 이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이 기록된 것은 여러분이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도록 하려는 것이고, 또한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31).

이  이야기의 첫 부분에서 예수님의 두 번째 평화의 인사와 함께 제자들에게 파견합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파견 이야기로 끝이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 구절 이후 파견에 관한 말은 한마디도 없습니다. 그 이유를 우리 독서를 통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을 고백할 수 있는 신앙 주체가 되면, 스스로 파견자가 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끝으로 필자는 복음 해설을 읽지 않고서도 성경 말씀을 직접 읽고 (부활한 예수님이 주님이시고 하느님이심을) 올바로 깨닫는 사람들은  진복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주간 첫날 저녁”(19), 성경을 펼쳐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의 아집에서 해방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것이 영생을 사는 첫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1, 2부로 나누어서 끝까지 읽어주셔서 갑사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좋은날들 되시기를...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