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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355) 신발 네 켤레
작성자유정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7-04-20 조회수676 추천수6 반대(0) 신고

 

 

 

 

벌써 몇년 전 일입니다.

레지오 주회를 마치고 오는 길에 혼자 사시는 연로하신 한 자매님댁에 잠시 들렸을 때입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아래를 보니 문 앞에 신발이 세 켤레나 놓여 있었습니다.

큼직한 남자신발과 여자용 단화 그리고 어린 아이 슬리퍼가 나란히 놓여있어 손님들이 온 것 같아 나 그냥 가야겠다고 하니까 자매님의 말씀이 그냥 가짜로 놓아둔 거라고 하시는 거였습니다.

 

며느리가 시어머님이 지하방에 혼자 기거하시니 혹 나쁜 일이라도 생길까봐서 식구가 여러 명 있는 것처럼 해야한다고 위장으로 놓아둔 거라고 하시며 한바탕 웃으시는 겁니다.

자매님의 신발까지 보태지니 아닌게 아니라 신발 네 켤레가 나란히 놓여있어 정답게 오순도순 살고 있는 한 가정의 견고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그순간 며느리의 시어머니에 대한 애틋하고도 살뜰한 관심과 정이 찡하게 가슴으로 느껴지며 어떻게 그렇게도 착하고 지순한 며느리가 이 시대에도 존재하는가 싶어 잔잔한 감동의 물결이 마음으로 전해져 오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면 그 자매님도 며느리를 지극히 생각해주는 시어머니셨습니다

30년 가까이 시어머니와 함께 사노라고 힘들었다며 한 번 자유롭게 살아보라고 며느리를 놓아 준 것입니다.

마침 살고 있던 집이 재건축되는 걸 계기로 홀로서기를 고집하신 거지요.

 

 

그 자매님 방에 가보면 참평화가 느껴집니다.

연로하신 분이 혼자 사는 고독이라든가 쓸쓸함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깊은 신심으로 예수님과 성모님과 함께 사시기 때문일 겁니다.

문을 열면 부엌이고 다시 문을 열면 방인데 침대 하나와 서랍장 두어개, 작은 탁자와 의자 한 개, 성물을 비롯하여 화분 몇개가 오밀조밀 놓여 있습니다.

어쩌다 한번 들르면 그 작은 방 좁은 공간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자매님의 한껏 누리는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깊은 신앙으로 사는 사람의 참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수년 전 우리 시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몇 개월이 지나고 나서 냉동실을 정리하다가 구석에 박혀있는 콩 봉다리를 발견했을 때였습니다.

병 나시기 며칠 전에 맛있는 울타리 콩이라고 족히 대두 한됫박은 넘을듯한 콩을 힘들게 까서 보내신 것을 냉동실에 넣고 게으른 탓으로 잊고 있었습니다.

꽝꽝 언 콩을 보고 얼마나 감회에 젖었던지요.

 

그렇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생각하는 자매님의 며느리를 보며 그 자매님은 행복한 분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난 한 번이라도 그렇게 시어머님을 진심에서 우러나는 마음으로 대하지 못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따뜻함이 없는 늘 형식적인 의무감뿐이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자책감이 드는 거였습니다.

 

한 치 앞도 못 내다보는 인간이기에 늘 후회가 남는 인생입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았을 때 더 그런 후회는 남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정말 잘 해주고 싶어도 더는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막막한 단절감으로  마음속에 부딪쳐 오는가를 시어머님의 죽음 앞에서 느꼈습니다.

자매님댁의 신발 네 켤레와 언 콩......

그 언 콩을  먹는 내내 난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아쉬워하며 좀 더 잘할 걸! 하는 자책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나도 시어머니 될 나이가 되어 그런지 이젠 시어머니 입장에서 늘 생각하게 되는 요즈음입니다.

그 자매님은 아파트가 완공되어 입주가 끝났는데도 여전히 혼자 사십니다.

며느리가 다시 모시려해도 좀 더 자유를 주겠다는 배려에서입니다.

며느리를 지극히 생각하는 고집때문입니다.

 

이렇게 서로서로 생각해주는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자매님은 그동안 한 번 이사를 하셨고 지금 사는 셋집은 전처럼 한데가 아닌  단독 주택의 마당 안에 있는 반 지하방이어서 이젠 신발을 여러 개 놓지는 않지만, 난 아직도 그 자매님을 생각하면 그때의 신발 네 켤레가 떠오릅니다.

 

가지런히 놓여있는 신발 네 켤레를 보고 느꼈던, 따뜻한 며느리의 정이 그렇게 마음에 다가오는 것도 아마 나이탓인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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