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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7년 만에 선창포구를 찾다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07-04-20 조회수587 추천수7 반대(0) 신고

            27년 만에 선창포구를 찾다 
                       1시간 20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을 27년 만에 갔다니!
      



▲ 27년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선창포구의 오늘 모습  
ⓒ 지요하

지난 13일부터 15일까지 3일 동안 아내와 함께 나들이를 했다. 올해 중2와 초4인, 엄마 잃은 두 조카 아이들을 데리고 사는 처지에서도 우리 부부가 사흘씩이나 나들이를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어머니 덕이다.

올해 84세 고령이심에도, 6년 전에 대장암 수술을 하신 몸임에도, 그리고 지난 1월 낙상을 하시어 오래 후유증을 앓으셨음에도 어머니께서 맑으신 정신과 허리 굽지 않은 몸으로 집안 살림을 주도해 주시니, 이보다 더 고마운 일은 없지 싶다. 하느님 신앙을 갖고 사니, 그 모든 일을 하느님 은총으로 여긴다.

13일과 14일, 이틀을 서울 동작구 상도동의 처형댁에서 잤다. 딸아이가 대학교 기숙사 생활을 접고 올해부터 이모 집에서 생활하게 된 덕이다. 처형님이 서울에서 자기 집을 갖고 사시는 것도 고맙고, 조카딸을 선뜻 받아주신 것도 고맙다.

전에는 홀로 서울에 갈 때마다 돌아오는 차 시간에 쫓기며 볼일을 봐야 했고, 서둘러 돌아오거나 여관방 신세를 져야 했다. 홀로 사시는 처형댁에 신세를 지는 것은 너무 죄송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차를 가지고 서울을 갈 수도 있게 되었고, 느긋하게 볼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건강보험공단'에서 지어 운영하는 고양시의 '일산병원'도 처음 가보았고(문병 일로), 덕분에 근처 '호수공원'도 구경했다. 서울 대방동성당과 상도동성당도 구경할 수 있었다.

15일 오후 집으로 내려오는 길에 서해안고속도로 화성휴게소를 조금 지난 지점에서 '발안/조암' 방면으로 차를 돌렸다. 화성시 우정읍 구곡리 '선창포구'를 가기 위해서였다. 그곳은 아산만과 인접한 남양만에서 조금 위쪽에 있는 포구다.

쑥스러운 얘기지만 나는 지난 10일 60회 생일을 지냈다(60이라는 숫자와 '예순'이라는 말이 너무도 버겁고 무안한 기분을 갖게 해서 만 나이로는 아직 59세라는 '주장'을 하지만…). 60회 생일을 지내면서 기념이 될만한 일을 궁리해 보았다.


▲ 선창포구에 형성된 시장 풍경  
ⓒ 지요하


13일의 출타는 진작에 예정되어 있었다. 13일 출타를 하면 서울에서의 일정 때문에 15일에나 돌아올 터였다. 그럼, 돌아오는 길에 남양만 근처 선창포구를 들러볼까 하는 생각이 쉽게 왔다. 비록 생일의 나들이는 아니지만, 생일과 가까운 일요일에 선창포구를 간다면 충분히 좋은 '기념'이 될 것 같았다.

그래. 내 60회 생일 기념으로 27년 만에 선창포구를 가는 거야! 무려 27년 만에 선창포구를 찾아보는 거야! 그런 결심을 하고 나니 이상한 흥분이 내 온몸을 감싸는 것 같았다.

27년 전에 나는 선창포구에 몸을 놓고 있었다. 1979년 가을부터 1980년 가을까지 1년 동안 선창포구의 간척공사장에서 생활했다. 5년 객지 유랑생활의 마지막 시기였다.

화성휴게소에서 네비게이션에 '화성시 우정읍 조암리' 안내를 부탁했다. 선창포구가 있는 구곡리 지명은 오래 전에 잊었지만, 우정읍 소재지인 조암리라는 지명은 내 뇌리에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다.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발안/조암' 인터체인지를 알려주는 안내판을 많이 보아온 덕이기도 할 터였다.

네비게이션은 조암까지 19분이 걸린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나는 조암을 향해 차를 움직이면서 무안한 기분을 삼켰다. 발안/조암 인터체인지 앞을 무수히 지나면서도 화성휴게소에서 20분도 걸리지 않는 길을 27년 동안 한 번도 밟아보지 않았다니…!

그동안 발안/조암 인터체인지 앞을 지날 때마다 27년 전의 선창포구를 떠올리면서 '거길 한번 가봐야 할 텐데… 언제든 저 길을 밟을 때가 올 거야'라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하지만 늘 마음뿐이었다. 27년 전과는 완연히 다른 길을 밟아 선창포구를 가보고 싶은 마음, 그곳이 어떻게 얼마나 변했는지를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을 골백번도 더 지녀온 끝에 드디어 2007년 4월 15일 그곳을 가게 된 것이었다.

나는 우정읍 조암리를 향해 차를 몰면서 아내에게 선창포구 시절 얘기를 들려주었다. 27년 전의 나는 당연히 총각이었다. 총각 시절 한때 몸을 놓고 있었던 곳을 27년 만에 다시 찾아갈 때는 동반자가 있으니, 그리하여 그 시절의 그곳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으니, 그 시절처럼 외롭지는 않은 길이었다.


▲ 선창포구 원래의 마을 안 길은 너무도 한산하여 을씨년스럽기도 하다.  
ⓒ 지요하

나는 선창포구 간척공사장에서 '10·26 사건'과 '12·12 사태'와 '5·17 쿠데타' 소식을 들었다. 광주의 '5·18 민주화운동' 소식은 아예 들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남양만 근처 외진 바다 한 굽이 간척공사장에서도 광주에 관한 이런저런 풍문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등단 전이었지만 이미 여러 문인들과 교류를 하고 있어서, 내가 머무는 곳에 소설가 천승세, 이문구, 방영웅, 구중관씨 등이 다녀간 덕에 광주에 관한 풍문을 접할 수 있었다.

공사판 생활 속에서도 나는 글을 쓰고자 했다. 그러나 제대로 글을 쓸 수는 없었다. 공사판 생활이 안겨주는 제약 때문만이 아니었다. 남녘에서 비쳐오는 핏빛 음영을 감지하면서 외진 바다 한 굽이에 몸을 감춘 채 편안히(?) 글이나 쓰고 앉아 있다는 사실은 내 양심을 괴롭히는 일이었다. 글을 쓸 때마다 나 자신이 부당하다는 생각으로 수없이 한숨을 쉬어야 했다.

그래도 나는 <노을엔 들녘이>라는 단편소설을 하나 지었다. 일 년 동안 공사판 생활을 하면서 겨우 얻은 유일한 작품이다. 그 작품은 1990년에 발표되어서 평론가들로부터 '수채화 같은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호평을 얻었다. 그리고 다음해 KBS2 라디오의 '라디오 독서실'에 소개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다. 1980년이라는 특별한 시대상황 속에서도 마냥 초연한 삶을 산 듯이, 훗날 평론가들로부터 '수채화 같은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평을 듣는 소설을 지었다는 사실은, 정말 묘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

나는 공사판에서는 도저히 작업에 몰두할 수 없는 관계로, 전에 써두었던 중편소설 하나를 챙겨 1980년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그러나 내 작품은 본심에도 오르지 못했다. 도대체 예심위원이 소설을 어떻게 읽는가 하는 의아심을 안고 작업복 차림으로 서울로 올라가서 예심위원인 소설가 오찬식 선생을 만났다.

그런데 오찬식 선생의 수첩에는 내 작품의 제목이 적혀 있지 않았다. 신문사에 가서 확인을 해보니 '접수대장'에는 분명하게 적혀 있었다. 신문사에서 원고를 예심위원에게 넘기는 과정에서 분실을 한 것이었다.

나는 너무도 어처구니없고 화가 났다. 정식으로 문제 삼을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오찬식 선생의 만류로 뜻을 접어야 했다. 허탈한 마음을 안고 버스를 타고 다시 공사판으로 내려가면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다음해도 나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 부문에 도전했으나 역시 고배를 마셨다. 심사평을 읽고 이상한 점이 느껴져서 본심위원인 문학평론가 유종호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 교수는 내게 "시대상황을 가늠 볼 줄 모르고, 당선시켜 봐야 발표될 수 없는 작품을 보낸다는 게 우습지 않으냐"고 핀잔을 했다. "지난해 응모했던 작품인데 신문사에서 분실을 해서 예심위원 손에도 가지 못한 작품"이라는 말을 하니, "그래요? 작년에 들어왔으면 당선인데!"라는 말을 하며 유 교수는 적이 아쉬워했다.


▲ 27년 전에 만들어진, 내 땀방울도 어려 있는 제방 길은 잡초가 무성하여 걸을 수도 없다.  
ⓒ 지요하

훗날 이 얘기를 들은 소설가 이문구 선생은 내게 "그때 그 작품이 분실되지 않아서 만약 당선이 되고 발표가 되었다면, 당신은 1980년 어느 날 군바리들에게 끌려가서 잘못되었을지도 몰라. 당신이 믿는 하느님이 당신을 살리려고 해서 원고 분실이 생긴 거야"라는 말을 하며, 소설가 이문열씨가 1979년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당선작품인 <새하곡(塞下曲)> 때문에 1980년 한동안 숨어 살았던 사정을 들려주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우리는 조암리에 도착했다. 거기서부터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선창포구를 가야했다. 27년 전에 조암에서 선창포구를 어떻게 갔는지도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선창포구가 있는 구곡리 지명도 그곳에 가서야 사람들에게 물어 알 수 있었다.

당연한 것이지만 선창포구는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우선은 바다가 없었다. 27년 전에 만들어진, 내 땀방울도 어려 있는 1500미터의 제방은 한쪽 끝이 마을 길과 이어져 있었다. 마을 바로 옆에 수문이 있었고, 그 수문 앞이 바로 포구였다.

그 수문 앞의 긴 갯고랑에는 어선들이 부산하게 들고나며 정박을 했고, 갯고랑 옆 선착장에는 언제나 그물이 쌓여 있었고, 어선에서 생물을 받아 실어 나르는 리어카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갯고랑도, 선착장도, 어선들도 없었다. 포구가 아니었다. 이제는 갯고랑이 아닌 좁고 지저분한 개울 옆, 갯바닥이 아닌 잡초 우거진 땅바닥에 수명을 다한 폐선 몇 척이 을씨년스럽게 놓여 있었다.

27년 전에 만든 제방을 비웃기라도 하듯 더 멀리 까마득하게 나아간 지점에 더욱 장대한 제방이 5년 전에 새로 만들어져서 이제는 바다 구경을 하려면 선창포구에서 남양만이나 매향리 쪽으로 한참을 더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 이제는 갯고랑이 아닌 개울 옆으로, 갯바닥이 아닌 잡초 우거진 땅 위에 붙박여버린 폐선들  
ⓒ 지요하


이제는 포구가 아닌 선창포구에 생선회와 조개와 새우 따위를 파는 음식점들이 즐비했다. 그리고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 음식점들과 시장 옆으로 원래의 마을 안 길은 퇴락을 느끼게 하는 한산하고도 쓸쓸한 모습을 한 채, 똥개 한 마리가 나그네의 발걸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낮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마을 안 길을 끝에서 끝까지 두 번이나 걸으며 27년 전의 아무개네 집과 공사판 사람들이 숙소로 이용했던 집이며, 밥을 먹었던 집을 찾아보려 했으나, 긴가민가 싶기만 할 뿐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이상하리만큼 쓸쓸하고도 모호한 반가움만 가슴에 가득할 뿐이었다.

내 땀방울이 어려 있는 27년 전에 만들어진 제방도 잡초로 뒤덮여 있었다. 내 단편소설 <노을엔 들녘이>에 등장하는 놀빛이 아스라이 물든 그 '제방길'이 전혀 아니었다.

이제는 바다가 없고 포구가 아닌 곳임에도 선창포구에는 그래도 사람들이 많이 찾는 것 같았다. 유료 주차장과 시장 근처 주차장에는 차들이 꽉 차 있었다.

옛날 포구가 있던 시절 사람들의 발걸음이 부산했던 원래의 마을 안 길은 그야말로 한산한 반면, 새로 생긴 시장이며 음식점들은 포구가 사라진 시절에도 호황을 누리는 기현상 안을 한동안 하릴없이 배회하다가, 다른 먼 곳에서 온 물건이라는 조개를 조금 사 가지고 우리 부부는 차에 올랐다.

"분명히 선창포구에서 구입한 조개이긴 한데, 이 조개가 선창포구와는 아무 관련 없는 생물이라는 사실이 묘한 허전함을 안겨주네."

쓸데없는 소리로 묘한 허전함을 확인한 다음, 더욱 명료한 허전함을 안은 채 나는 차를 움직였다. 거기에서 태안까지는 1시간 2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1시간 20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을 27년 만에 갔다니! 그 사실이 재미있기도 했지만, 그것이 내가 선창포구에서 안고 온 묘한 허전함을 달래주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2007-04-20 14:14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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