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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가페(신적 사랑)보다 필레인(우정)을 원하셨습니다.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4-22 조회수565 추천수4 반대(0) 신고

 

 

<아가페보다 필레인을 원하셨습니다.> *아가페-신적 사랑, 필레인-우정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요한 21,15-19)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시어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주님께서 안나스 저택에서 심문 받을 때, 베드로는 죽음이 무서워 주님이신 예수께서 당하시는 수난을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자신 있게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13,37)라고 말했던 그가 주님께서 예언하신대로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그 사실이 너무 마음에 걸렸던 베드로는 주님 사랑에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낙심한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험하고서도 고향 티베리아 호수가로 돌아가 고기잡이 생활로 복귀하였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다시 찾아 주십니다.

  인간이 얼마나 자신의 허물에 발목 잡혀 스스로 괴로워하는지 주님은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진정 우리를 정확하게 진찰하여 치료해 주시는 명의이십니다. 인간은 자신의 열등감이나 상처를 숨겨 자기마저 모르게 감추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무의식 속에서 그 죄의식은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전히 화해하지 않고는 죄의식 속에서 스스로를 옭아매는 어리석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가두어 두는 폐쇄를 벗어나는 길은 남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는데 있습니다.

  먼저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다가가셨습니다. 화해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세 번에 걸친 배반에 맞추어, 세 번에 걸쳐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며 용서 해주셨습니다. 상처를 준 사람보다 상처를 받은 사람이 먼저 손 내밀 때 진정한 화해가 일어나게 됩니다.

  참을 忍자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했는데, 사랑 愛자 세 번이면 우주를 변화 시킬 수 있습니다.

  이때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사용된 단어에 차이가 있습니다. 앞에 두 번은 아가페 동사를, 세 번째에는 필레오 동사를 썼습니다. 그리스어에는 사랑(愛)에 세 가지 단어를 사용하여 구별합니다. 아가페는 신적인 사랑과 부모가 자식에게 쏟는 사랑을 뜻합니다. 필레오는 친구 간에 나누는 사랑, 우정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에로스는 이성 간에 나누는 애정을 뜻했습니다.

  처음에는 '~보다 더 사랑하느냐'의 비교급으로 사랑의 강도를 물으셨고, 베드로는 “예. 주님”하고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두 번째 질문에도 베드로는 흔들리지 않는 사랑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세 번째 질문에 가서야 마음의 동요를 일으켜 슬픈 표정을 지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았습니다.

  베드로의 장점이자 단점이 바로 그런 확신에 찬 태도이었습니다. 지나친 것이나 모자란 것 모두 타인에게는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약한 점은 북돋우시고, 강한 점은 깎아 내리십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아는 겸손, 그런 정신으로 예수님의 양들을 돌보아야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가능한 인간적인 사랑을 물으십니다. 인간은 신에게 아가페적인 사랑을 드릴 수 없습니다. 오로지 하느님만 우리에게 아가페적인 사랑을 주실 수 있습니다. 인간이 드릴 수 있는 사랑은 그에 못 미칩니다. 그 확연한 차이를 겸손 되게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인간적인 사랑을 오히려 부족하다 않으시고 받아들이십니다. 인간끼리는 베푸는 사랑이 아닌 우정이 더 필요합니다. 아가페가 아니라 필레인이 인간 사이에는 더 잘 통합니다. 받아드리는 사람도 우정이 더 정겹고 부담이 없습니다.

  사목은 우정이지 시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후예들에게 진심어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봉사를 베풀러 나간다는 생각은 아예 품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정을 나누러 나간다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봉사를 하러 나갔다가 오히려 봉사를 받고 왔다는 고백을 합니다. 그것이 참된 자세입니다. 필레인은 서로에게 따뜻함으로 다가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또 다른 가르침을 주십니다. 우리는 젊었을 때에는 열심히 봉사했다가도, 나이가 들었을 때 남들에게 봉사 받는 것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조심해야할 덕목이 있는데, 고집을 버려야한다고 옛 스승들은 가르칩니다. 자기가 겪은 경험이 옳다고 생각하고 가르치려들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고집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늙어서는 두 팔을 벌리고 서서 후세에게 책임을 맡겨주는 것이 미덕입니다. 정상에서 내려올 때를 아는 사람은 진정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뒷방 노인네 소리듣기를 두려워하기보다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더욱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Andrea Bocelli Canzone Dell'Amore non si sa 그대가 알지 못하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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