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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 2007.4.22 부활 제3주일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7-04-22 조회수673 추천수4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7.4.22 부활 제3주일

                                                          

사도5,27ㄴ-32. 40ㄴ-41 요한 묵5,11-14 요한21,1-19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오늘은 부활 제3주일, 계속되는 주님의 부활 축제가

바야흐로 활짝 피어나기 시작한 배꽃들과 더불어

우리 마음을 흥겹게 합니다.

 

이 기쁨의 부활시기,

죽음 같은 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청초하게 피어나는 모든 봄꽃들,

모두가 주님 부활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그대로 아침 성무일도의 두 후렴과 잘 어울립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구원을 얻으리라.

  알렐루야”


“주님의 이름은 하늘과 땅위에 드높으시도다.

  알렐루야.”


온 세상의 모든 피조물에까지 미치는

부활하신 주님의 광대하고도 장엄한 구원지평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계셔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차게,

아름다운 사람들 되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써놓은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라는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봄꽃 활짝 핀 나무들,

그대로 주님의 부활을 사는 사람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동안거(冬安居)를 끝낸
겨울나목(裸木)들!
잎눈들
꽃눈들
임 사랑에 활짝 열리니

오,
찬란한 태양(太陽)
광활한 창공(蒼空)
모두들
깨달은 꽃나무 각자(覺者)가 되었네!

내 존재의
미소(微小)함, 공허(空虛)함
깨달음으로부터
임 향해 터져 나오는
끝없는 찬미(讚美)와 감사(感謝)!

웃음 같기도
눈물 같기도 한
꽃 같은 깨달음이여!
새롭게 열리는 세상이여!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무엇보다 중요한 게 부활하신 주님의 체험입니다.

우리의 극진한 사랑의 노력에

주님 선사하시는 최고의 선물, 부활하신 주님의 선물입니다.


두말할 것 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온 몸과 온 마음, 온 정신과 온 힘을 다해

갈림 없는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나타나 다짜고짜 물으십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물으십니다.

 

아마 세 번 당신을 부인했던 아픈 추억 때문에

베드로의 사랑을 거듭 다지기위한 배려 같기도 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째 물음에 울먹거리며 대답하는 베드로의 대답이

참 감동적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사실 마음 약해서 엉겁결에 주님을 부인했던 것이지,

사랑 없어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가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뻔히 베드로의 심중을 알면서도

사랑을 고백하게 함으로 베드로를 강하게 하시려는

주님의 깊은 의도입니다.


과연 여러분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셔서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실 것 같습니까?

 

평생 자문해야하는 화두와 같은 물음입니다.

 

주님 사랑은 애매하거나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세 번 주님께 사랑을 고백할 때 마다

주님의 간곡한 당부 말씀은 딱 하나였습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에 역점이 있습니다.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닌 주님의 양들인 형제들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제들이 좌우명처럼 삼아야 할 말씀입니다.

주님의 양들에 대한 사랑으로 주님 사랑의 진정성이 입증됩니다.

 

비단 사제들뿐 아니라

주님의 양떼들인 우리들 역시,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주님 소유의 모든 형제들을

최선을 다해 돌보고 배려해야 하겠습니다.


이어 주님은 베드로에게 마지막으로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십니다.

 

한결같이 말로의 사랑이 아니라

몸의 실천이 동반되는 주님께 대한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할 때 비로소 자유로운 삶입니다.


세상 한 복판에 살되 세상에 매이지 않는,

바람 같은, 물 같은, 구름 같은 초연한 삶입니다.

 

세상에서 해야 할 책임을 방기한 무책임한 자유가 아니라,

이탈의 무욕에서 오는 참 자유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란 보물을 늘 모시고 있으니

세상에 부러운 것도, 두려운 것도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상대화 시켜 버리니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이들을 유혹할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의 의식주만 있어도

자족하며 기쁘고 행복하게 삽니다.

 

바로 1독서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사도들,

추호도 두려움 없이 대사제 앞에서

주님 부활을 증언하지 않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의 체험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온갖 모욕과 박해를 딛고,

천년 로마 제국을 접수한 분이

믿는 이들을 통해 활동하신 부활하신 주님이요,

이 믿는 이들 안에 계신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솟아나는 힘을, 기쁨과 평화를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막아 낼 수 없었습니다.

 

2독서에서 보다시피

사도 요한은 환시 중에 하느님의 옥좌는

동시에 어린양의 옥좌임을 깨닫습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 양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이런 어린양의 환시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사도 요한인데

그 무엇이 부럽고 두렵겠습니까?

 

우리 역시 옥좌를 상징하는 제대 주위에서

천사들처럼 끊임없이 미사와 공동기도의 전례를 통해

하느님을 찬미하므로

알게 모르게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체험은 분명 은총의 선물이지만,

주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은

한결같이 주님을 그리워하며 사랑했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함이 자연스런 순리 같습니다.

 

아니 어찌 보면 주님 향해 솟아나는 이 사랑이

이미 알게 모르게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증거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자체가

생명의 하느님 체험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은

새삼 우리 모두에게 당신 향한 사람을 확인하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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