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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57) 가출 / 이순의(제노베파)님
작성자유정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7-04-25 조회수702 추천수6 반대(0) 신고

 

 

 

                                     

                                      가출

                                                   글쓴이 : 이순의 (제노베파)

 

 

출타 중인 남편의 버릇은 무조건 "알았네." 로 일관하여 전화를 받는다.

겨우 조금 보태어 받을 때는 "옆에 손님 있네." 가 전부다.

그래도 먼데 집 밖에 머무는 남편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것이 기다리는 아녀자의 안심이 되곤 하였다.

 

 

기다리는 것에 이골이 난 나에게도 "알았네." 라는 말보다 남편의 큰 위로가 필요한 날이 있었다.

그날만은 "옆에 손님 있네." 라는 말이 듣고 싶지 않았다.

 

20년을 희망으로 삼아서 살아온 아들 녀석의 대학교 불합격 소식이었다.

"언제 틈 내서라도 조용히 전화 한 번만 해 줘요." 라고 남편에게 부탁한 시간이 오전 10시경이었다.

 

그리고 종일 몇 번의 전화를 더 했고, 휴대전화기의 발신자 번호만 보고도 남편은 무엇을 알았는지 '알았네." 라는 한 마디뿐이었다.

여전히 내 쪽에서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전화는 끊어졌다.

 

 

내가 주님을 믿는 신앙인이기도 하지만 한 아이의 엄마라는 본성적 생명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희망으로 여기며 살아왔을 텐데, 자식의 진로가 잠시 멈추어버린 좌절은 누구에게도 나눌 수 없는 아픔이었다.

 

그 시간에 내가 말이라도 해보고 싶은 동반자적 위로는 남편뿐이었다.

그러나 하루가 가고, 해가 지고, 자정을 넘기도록, 남편은 아들의 소식을 전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심야에는 그림공부 하느라고 점수 세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참아내지 못했다.

 

기다림!

20년동안의 기다림!

밖에 나간 남편을 기다릴 적에는 없던 공덕도 생겨날 정도로 자숙해야 한다고

아낙의 최면을 걸며 지탱해 온 성가정의 의무가 한 순간에 원망으로 돌변하고 말았다.

 

 

"당신이 나를 알아?

 뭘 아는데?

 하루 종일 전화기에 대고 알았다는데 도대체 뭘 알지?

 당신이 나를 모르는데 내가 당신을 어떻게 알아?

 나는 당신이 누군지 몰라!

 몰라! 몰라! 몰라! 몰라!"

 

 

늦게 귀가한 남편 앞에 터져버린 감정의 봇물은 뜻하지 않게 나를 대문 밖으로  내몰고 있었다. 결혼 20년만에, 세상에 태어나서 47년 만에 처음으로 가출을 하고야 말았다.

언제 그가 나의 말을 들어 준 적이 있었던가?

20년의 견딤이 외로움으로 사무쳐 왔다.

 

세상은 어두운 밤이었고 머물고 싶지 않은 집은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싸늘한 둥지였다.

왜 가출이란 극단적인 행동을 했는지 명백한 답은 서지 않았다.

무조건 싫었다.

이유없이 다 싫었다.

모든 것이 귀찮았다.

생명의 단절은 생각보다 간단한 노출이었다.

 

 

꼬박 사흘을 찜질방에 박혀 꼼짝하지 않았다.

먹고 자고 또 잤다.

너무도 쉬운 노출에 생존을 포기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잠속에 묻으며 스스로를 잊고 있었다.

 

그렇게 지내다 나흘 만에 해를 보았을 때는 마음이 먼저 근처의 성당으로 내 발길을 이끌었다. 물어 물어서 성체조배실에 들어가 큰 절을 올리고 마음에 없는 공허한 기도문을 외웠다.

그리고 생각 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내일은 명동 성당에 가서 미사해야지" 라고 계획이 섰다.

그리고 큰 절을 하고 일어나 성체조배실을 나오는데

"내일은 우리 집에 가야지!" 라고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내가 주님을 믿어 행복한 시간이었다.

 

닷새째 되는 정월 초하루 날에 명동에서 미사를 드리는 동안 가슴이 따뜻하게 돌아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남편의 선물도 사고 싶고, 아들의 선물도 사고 싶었다.

양손에 선물꾸러미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부끄러웠지만,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남편이 부등켜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자네 마음을 그렇게 몰라주는 놈인지를 정말 몰랐네.

 미안허네. 앞으로는 자네 마음을 알아주며 살라네.

 용서하고 돌아와 줘서 고맙네."

 

 

내가 주님께 청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주님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계셨다.

사랑이신 주님은 내 마음만 용서하시는 분이 아니셨다.

남편의 마음도 함께 용서하고 계셨다.

 

 

                           **********

 

 

위의 글은  2006년도  <성체조배>라는 책자에 실린 이순의 자매님의 글입니다.

잠든 아들의 곁에 앉아 <몽당연필>을 깎으며 눈시울을 적시던 이순의 자매님...

그 아드님은 곧 대학에 합격했고 1학년을 마치고 지금은 군에 입대하여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받고 있답니다.

 

자매님은 묵상방을 떠나 있는 동안 자연과 더불어 삶의 현장에서 땀도 흘리면서 귀중한 체험들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바쁜 중에도 시간을 내어 수필도 여러편 쓰고 긴 소설도 탈고하면서 아주 값진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순의 자매의 작품들이 지금은  원석 속에 숨겨진 보석처럼  제 빛을  다 내고 있지 못 하지만 언젠가는 잘 다듬어져 찬란한 빛을 발할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믿습니다. 

오늘 오랜만에 전화를 했더니 멀리  남도의 섬집에 다니러 가 있다고 하네요.

바다가 있는  그림 같은 풍광의 섬집에서 또 많은  이야깃거리를 안고 오지 않을까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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