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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는 그분의 인격을 먹고 마셔야 한다.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4-27 조회수624 추천수5 반대(0) 신고

 

 

<우리는 그분의 인격을 먹고 마셔야 한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요한 6,52-59)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라는 선언에 깜짝 놀라며 의문을 갖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하고 묻습니다.


  “어떻게 가능한가?(포스 뒤나타이)”라는 말은 요한복음 3장4절과 9절에서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질문했을 때 두 번 사용했습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요한 3,9-10)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되묻는 것은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는 뛰어난 율법학자였기에 구약에서 누누이 표현된 것을 그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다만 이론적으로는 알겠는데 실천적으로, 실존적으로 영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에 의문을 가진 것입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실존적으로 자신이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니코데모의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아주 색다르게 대답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3,14-16) 

  ‘어떻게’가 아니라 “외아들의 수난과 들어올림”을 통해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라고 답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니코데모의 질문과 달리 군중들은 아예 부정적 어감으로 예수님께 빈정대는 모습입니다. 수근 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말다툼이 벌어질 정도였습니다. 너무나 황당한 이야기였기에 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도 예수님께서는 직접 ‘어떻게’에 대해 설명하시는 것이 아니라 살과 피를 언급하시면서 수난과 죽음을 암시합니다. 유대인들은 동물의 피를 생명이 담긴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피는 마시면 안 되는 금기 음식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살에다가 피까지 언급하십니다.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군중들은 더욱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57절에 가서는 아예 더 확실하게 “를 먹는 사람도 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빵이라는 상징적 표현이 아니라, 살과 피라는 간접적 표현이 아니라 직접 ‘나(에고)’라고 확실하게 언급하십니다.


  나(에고)는 인격을 뜻합니다. 인격은 한 인간의 생각과 말과 행동과 영혼을 모두 아우르는 집합체입니다. 그저 살과 피라는 것으로 축소되는 것보다 더 큰 범주를 나타냅니다. 인격은 한 인간이 살아온 전 생애를 포함합니다. 생긴 겉모습이나 꾸며진 모습을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나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내 생명까지 담고 있는 언표입니다. ‘나를 믿어라’하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평소에 보여준 행동을 보아서 믿으라는 말입니다. 그 사람이 언제나 자기가 한 말을 틀림없이 지킨다면 그 말은 그의 인격이기 때문에 언제나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 한 가지 보증을 덧붙이십니다. 바로 아버지와의 관계를 보증으로 내세우십니다. 당신의 말씀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당신의 아버지와 밀접한 관계로서 더 확실하게 말씀에 증거를 대십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이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며 요한복음서의 주제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맺는 사랑의 관계가 이제는 우리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단 아들의 몸을 우리 안에 받아 모심으로서 그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외 아드님이 아버지와 사랑의 관계로 이 세상에 오셨다면, 우리는 그 사랑의 증표인 성체를 통하여 그분의 아버지와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아버지가 다름 아닌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참되며, 우리가 그분을 모시는 것은 바로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올바로 납득하지 못한 것은 일면 이해가 됩니다. 그것은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그 신비를 신비로 남겨 두지 않으셨습니다. 당신 스스로 말씀을 입증해 보여 주셨습니다. 예고하신대로 들어올림을 보여 주셨습니다. 죽으셨지만 곧 부활하셔서 아버지 오른편에 앉으시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바로 이 들어올림을 모든 믿음의 확증으로, 출발점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다름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을 우리 안에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외 아드님과 우리가 하나의 관계로 맺어져, 그 사랑의 관계를 이웃과 나누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멘.

 

  

 PS; 제가 존경하는 교우분이 영성체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그렇게 거룩하게 보이는지 여쭈어 본 적이 있습니다.

  자기는 영성체 중에 “주님, 어서 오십시오. 주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라고 꼭 속삭인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집중하며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성체의 힘이 미치는 것을 상상한다고 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멋지며 운이 좋은 사람인지 또 행복한 사람인지 되새긴다고 합니다. 영성체 시간만큼은 청원기도나 괴로움, 고통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쓸데없는 걱정으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오로지 감사만을 떠올린다고 하십니다. 매사를 새롭게 시작하는 데 힘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가능한 빨리 영성체할 수 있는 앞자리에 앉아서 충분히 묵상하도록 한다고 말하십니다. 그 조언이 제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이 자리를 빌려 그 형제님께 감사한 마음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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