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4월 28일 야곱의 우물- 요한 6, 60-69 묵상/ 다양성 안의 일치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7-04-28 조회수552 추천수3 반대(0) 신고

다양성 안의 일치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요한 6,60-­69)

◆몇 년 전 중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지친 다리를 끌고 어느 절에 들어가니 대웅전 마룻바닥을 치며 울고 있는 사람과 웃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궁금해서 안내자에게 질문을 했더니 함께 간 보좌 신부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였습니다. “수녀님, 딱 보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까? 울고 있는 것을 보면 무언가 슬픈 사정이 있는 것이고, 웃는 것을 보면 무언가 기쁜 일이 있는 건데 물어볼 필요가 있나요?”

 

잠시 후 안내자가 그 절의 스님에게 물어보고 오더니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마룻바닥을 치며 울고 있는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난 새 생명이 앞으로 받을 고통을 생각하고 미리 울어주면서 행복을 빌어주는 기도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웃는 것은 집안의 어느 분이 돌아가셔서 이 세상의 고통이 끝났으니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웃으면서 사시길 비는 것이랍니다.

 

우리나라와는 정반대의 표현이지만 공통점은 둘 다 행복을 빌어주는 것으로, 겉모양을 보고 자기 나름의 상식으로 판단하는 것을 깨뜨려야 진실을 알 수 있다는 설명에 모두가 공감했습니다. 그렇게 조금은 장난 섞인 질문을 한 것이 의외로 깊은 깨달음을 얻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고백한 사도 베드로처럼 성당에 와서 기도를 드리지만 그 표현 방법에 있어서 사람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정작 주님께서 영원한 말씀을 지녔다는 중요한 사실은 망각하고 고정된 시각으로 표현 방법에 중점을 두고 요구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사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이해하든지 이해하지 못하든지,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어떤 방법으로 기도를 표현하든지 상관없이 신앙하는 것입니다.

 

믿고 받드는 것. 그것은 다양성 안에서 진정한 일치를 이뤄가는 것입니다.

이세영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