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 성소 주일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4-29 조회수573 추천수2 반대(0) 신고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 성소 주일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10,27-30)



  유대인들은 예수라는 인물의 등장으로 메시아 도래에 적지 않은 기대를 가졌습니다. 비록 자기들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그가 미덥지 못하지만 그래도 확실한 대답을 원했습니다. 혹시라도 메시아라고 대답한다면 그를 전면에 내세워 새로운 독립 운동이라도 벌일 판이었습니다.


  성전 봉헌절(하누카절, 수전절)은 유다 마카베오가 시리아 황제인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가 BC 167년에 일으킨 성전모독 사건에 대항하여 항쟁을 벌인 결과, BC165년에 성전을 재 봉헌한 일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유대력으로 9월인 기슬래우달 25일에 시작하여 8일간 벌어집니다. 그러니 봉헌절 축제를 맞아 그들의 관심이 예수께 쏠렸습니다. 예수께서 메시아인지에 대한 기대심리가 극도로 달했던 것입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요한 10,24-25)


  예수께서 그들의 속셈을 빤히 알고 계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정치적 독립 운동가를 원했던 것입니다. 유다 마카베오가 귀족가문도, 왕족 출신도, 예루살렘 출신도 아니었지만 독립전쟁에 나서서 민중을 지휘했던 것처럼 예수에게도 그런 역할을 기대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도저히 그들의 질문에 대답을 할 수가 없으셨습니다. 아무리 설명해보아야 씨가 먹힐 리가 없었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관점이 서로 다른 데야 알아들을 리 만무했습니다.


 요한복음서에 예수님께서 메시아인지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가 몇 번 있습니다. 4장에서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라는 예수님 말씀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 여인은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 하고 말합니다. 그러니 보다 확실한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연들이 필요했습니다. 또 14,11절에서 열두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시며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시는 일’은 여기 10장에서도 예수님의 정체를 가리키는 근거가 됩니다. 예수께서 보여 주시고자하는 메시아의 역할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메시아상과 전혀 달랐습니다. 여태껏 알려지지 않았고 전혀 새로운 사건을 설명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온전하게 이해시킬 방도는 더더욱 없었습니다. 오로지 말씀을 실천해 보이는 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수행하시는 일들을 보고 각자가 절실하게  느껴 깨닫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에게 필요는 깨달음의 어머니입니다. 절실한 바람이 있어야 그는 찾게되고 발견하게 됩니다. 삶에서 맞닥뜨리는 고난과 불행과 부족함이 어떤 면에서는 깨달음의 어머니가 됩니다. 유대인들이 민족의 독립을 간절히 원했기에 정치적 메시아를 찾았듯이, 영원한 생명과 빛과 진리를 원하는 자만  선한 목자를 찾는 것입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마태 7,7)

 

  이렇게 찾는 것에도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진리와 참자아를 찾아 헤메는가 하면 허망한 가치, 이데올로기, 육체적 행복만 추구할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처음으로 아는 특권을 조상들에게 물려 받았어도, 하느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찾기보다 오로지 현세적인 욕망만 찾았습니다. 참 진리에 귀와 눈을 열기보다 자기네 생각만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현대사회에 와서도 인간들은 자기네 말만 하고 남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집단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습니다. 여기에 참자아는 없고, 내가 속한 집단만 있습니다. 그 집단이 와해되면 나는 또 다른 집단을 찾아 헤멥니다. 그런 사람들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뿐입니다. 살아도 참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영생은 바랄 수 조차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목자로 아는 양들만 그 말씀을 온전히 알아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선한 목자로 믿고 절실하게 따르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어떤 세력도 양들을 예수님의 손에서, 하느님의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그 양들을 지키는 손(케이르)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위대한 손을 가지셨듯이 그 아드님도 아버지의 일을 수행할, 권능의 손을 지니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다만 그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귀를 닫았을 뿐입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첫 출발은 우선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데 있습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랬기에 많은 종교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데는 또 다른 면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목소리가 아닌 하느님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려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가려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소명입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것이야말로 참된 소명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손을 가지셨듯이 예수님도 양들을 구원하시는 손을 지니셨습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또 아버지는 아드님의 영광을 들어 올리셨습니다. 그 영광은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주고받으시며 하나되심으로써 확인되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십니다.

 

   01. Walking in the Air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