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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의 음성 / 이인주 신부님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5-01 조회수1,005 추천수9 반대(0) 신고

마음의 소리=하느님의 음성


성서의 소리는 마음의 소리이고 그 시대를 대표하는 예언, 찬미, 공경, 평화, 사랑, 역사의 증언과 징표의 실체가 되기도 했다. 그럼으로 마음의 소리는 곧 하느님과 통하는 채널이자, 곧 하느님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하느님의 음성이었다.



그러나 하느님과 대화하지 않았던 사람에겐 이게 뭔 소리인가? 하고 답답할 것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요? 그건 그분들이 특별한 은총이 있어서 그런 것 아니었는가요?

 

그렇다면 누군 특별한 은총에 있고, 누군 안 된다는 말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사람은 하느님 앞에 다 평등하고 그분으로부터 은총을 받을 권리가 있다. 그 권리가 있는 대신에 그분에게 드려야 할 의무도 있는 것이다. 그 의무가 바로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이요,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가며 그분과 대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 각자 나름대로 영적체험이 조금씩은 다 있다. 다만 그것이 영적체험이었나 할 정도로 무딘 삶을 산 것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질 못한 것이 문제라고 본다. 예로, 내가 위기에 처하거나, 강렬한 기도를 바칠 때, 마음에 변화가 오면서 가슴이 떨리거나 뭔가 마음 안에 들려오는 소리를 체험하게 된다. 이것이야 말로 곧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첫 순간이 아닐까 싶다.



예로, 모세가 탈출기 3장에서, 떨기는 타고 있는데 불꽃이 없어, 가까이 가 보았더니, 네가 있는 곳은 거룩한 장소이니 신을 벗어라. 사무엘 3장에서 사무엘이 엘리의 부름인 줄 알고 뛰어가 보면, 그것은 엘리의 불음이 아님을 3차례 듣고 나서 엘리를 통하여 하느님의 음성임을 깨닫게 된다.

 

이냐시오 성인은 까르도네 강가에서 환시를 보고 나서 자신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 뭔가 하느님의 음성과 모습을 보고 난 뒤, 완전히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 분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다. 본인 아니면, 부모, 아니면 조상 차원에서 아주 열정과 정성을 다해 기도를 하느님께 올렸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이런 좋은 징표로 하느님의 음성을 접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 부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일반대학을 졸업하고,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대학을 계속 지원하지만 그 때 마다 고배를 마셨던 한 형제가 있었다.

 

낙방의 이유가 뭔지 모르는 가운데서도 정성을 다하여 기도 하는 가운데 도전을 했고, 이젠 하느님이 나의 기도를 안 들어 주시나 보다 싶어 포기하려는 모습을 보일 때, 하느님께서는 그 형제에게 꿈이라는 영적연결 고리를 통하여, 이렇게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검은 커다란 글씨의 수도원” 그 형제는 그래 수도원을 찾았고, 아무 걸림돌 없이 단번에 수도원에 들어와 해외유학까지 잘 다녀온 뒤, 지금은 거룩한 사제로 잘 살아가고 있다.



이런 내용들을 종합해 볼 때 하느님은 모세, 사무엘, 이냐시오 시대에만 활동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안에 함께 똑같이 숨 쉬시면서 활동하고 계신다는 의미이다. 그건 바로 매일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살과 피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부활은 믿는 이들에게만 현현 되었듯이, 오늘의 삶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장에서 자신을 온전히 다하여 그분께 봉헌된 삶을 사는 이들에게 드러나는 은총의 선물이 바로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만의 하나 그 신부님께서 자신은 하느님의 사람이 될 수 없어 하고, 낙담 끝에 교회와 하느님을 등졌다면, 하느님과 교회와 신학교를 원망하며 살다가, 냉담하면 안 되겠다 싶어 지금쯤 다시 돌아와 있을지는 모르지만, 절대로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님을 우린 알아야한다.

 

사람들은 스스로 또는 자기들 안에서 상처주고 희망을 저버리게 할지 몰라도, 하느님은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하느님은 당신을 향해 희망하고 신뢰하면 반드시 고난의 시간을 넘어 그 뜻을 이뤄주시는 분임을 꼭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어떤 때는 장난을 걸어오시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기 때문이다. 요나서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등지고 도망치는 요나를 끝까지 찾아내서 당신의 길을 가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당신의 제자들을 박해하던 바오로를 당신의 으뜸 제자로 삼으신 것만 봐도 그분의 속이 얼마나 넓고 깊이가 있으며 어떤 것도 다 가능함을 우리는 그분의 마음 안에서 읽을 수 있다. 이것이 보이는 분들은 바로 하느님의 음성을 제대로 듣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들의 속을 잘 보아야한다. 위기 뒤에 반드시 호기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위기가 뭡니까? 위태로울 위에 기계기이다. 그럼으로 우리가 위기에 패하여 좌절, 실망한다면 자신은 아주 보잘 것 없다 못해, 아예 자신의 존재자체를 거부하게 되고 만다.

 

그러나 그 위기를 인내해 내고 그분께 간절히 간구하면 그분은 아무리 큰 위기도 종식시켜주시면서 그 자리에 커대한 희망이라는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그런 분이시기에 우리처럼 좁쌀 같은 그런 분이 아니시라 아주 큰 분이신 것이다.

 

한 마디 더 가미한다면, 걱정과 위기가 없는 사람은 편안함이 있기는 해도, 위기를 맞은 사람처럼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인 그분의 음성을 체험하는 그런 기회 또한 없을 것이다.

 

그러니 각자 받은 그분의 달란트와 그분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은총의 선물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분은 한 사람 예외 없이 당신 곁으로 오시길 기다리는 분이라는 것을 최악의 상태라도 잊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분이 주신 생명의 신비의 성소를 잘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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