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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미사의 소프트웨어 I[제 48-1회]/ 정훈 베르나르도 신부님.
작성자양춘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7-05-01 조회수615 추천수6 반대(0) 신고

 

 

미사의 소프트웨어 I[제 48-1회]/ 정훈 베르나르도 신부님.


- 말씀 전례 2-새겨서 전하기.-


우리는 지난 장에서 말씀 전례의 전반부를 공부하면서,

 성경 말씀을 통해 하느님과 내가 공동 작업으로 내 삶을 만들어 가야 하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독서와 복음은 귀에서 머리나 마음으로 들어와 내 인격과 섞이는 자기 동화의 과정이 일어나야 하고, 눈이나 귀로 들어온 성경 내용이 머리와 마음에서 내 삶으로 변화하여 입으로 화답송이나 복음 환호송을 기도 하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는데, 이제는 사람인 내가 말씀으로 변화하는 신비를 묵상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말씀을 섭취하는 방법을 공부한 다음에 생각해야 할 것은 받아 모신 하느님 말씀을 소화시키는 방법입니다.

이 작업은 말씀 전례에서 후반부 시작인 강론부터 시작합니다.


- 강론에 대한 악습과 편견 - 

우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강론에 대한 소프트웨어를 반성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신자는 죄책감을 느껴야 좋은 강론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신자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또 다른 신자는 유식한 말을 최고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미사의 소프트웨어에서 가장 편차가 심한 것이 강론입니다.

따라서 일반 신자가 미사 시간에 가장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부분이면서도, 가장 자의적인 판단을 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강론입니다.


우리 안에 뿌리박혀 있는 이중적인 기준-삶과 신앙을 분리 하려는 아집이 강론을 맞는 이야기인 것 같지만, 왠지 현실성은 없는 것처럼 만들어 버리곤 합니다.

우리가 강론 시간에 가질 수 있는 잘못된 소프트웨어를 대충 가음과 같이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신자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제의 강론에서 복음과 삶의 신선함을 못 느끼고 애초에 듣지 않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저희 사제들이 말솜씨도 없고, 하느님 말씀으로 밥상을 제대로 차리는 재주도 없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카리스마와 화술로 사람 마음을 휘어잡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은 것 같은 강론에 신물이 나고 염증을 느끼는 분은 자세부터 다릅니다.

벌써 강론에서 무엇인가 쓸 만한 내용을 듣는 일은 포기한지 너무 오래 됐기 때문에, 또 지겹고 무료하기 때문에, 복음을 듣고 앉자마자 주보를 본다거나 다리를 쭉 뻗고 다른 공상을 하면서 그 시간을 때울 채비를 합니다.

그러면서도‘원! 세상에나, 저렇게 재미없는 내용을 어쩌면 저렇게 길게 이야기 하다니?”하면서 짜증을 냅니다.


두 번째로 강론이 재미가 없는 이유는 세상에서 격렬한 생활을 하는 신자들의 구미를 당기는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는 강론에 대한 그 사람의 세속적인 선입관이 너무 강하고, 자신이 선호하는 강론 취향에 일방적으로 고정되어 있어서 일어납니다.

이런 소프트웨어 안에는 세상 풍파를 겪느라 피 땀 흘리며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다시 말해 세상 물정 모르는 온실 속의 화초나 동화 속 주인공처럼 쓸데없는 것을 심각하게 이야기하는 사제를 우습게 평가하는 돌같이 굳은 마음이 깊은 곳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인지“맨 날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지 뭐!”,

“도대체 내가 사는 것과 그런 이야기들이 무슨 상관이야?”고 속으로 중얼거립니다.

그리고,“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한 두 번이지, 어쩌면 저렇게 똑같은 말을 매일 하는 것이 지겹지도 않나?”하면서 사제를 오히려 안쓰럽게 걱정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사제가 의도한 강론의 주제를 자꾸 세속적으로 뒤집어서 알아듣는 분이 계십니다.

그 날 강론을 전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단편적인 것에 집착합니다.

“저 이야기는 이럴 때 써먹어야지, 그 이야기는 요럴 때 쓰면 딱 이야.”하면서‘이것’을 들으면서‘저것’을 생각하고,‘이런 일을 이야기하면’저런 일‘을 결심합니다.

사제는 복음을 잘 알아듣게 하려고 예화를 드는 데, 독서와 복음은 생각이 안 나고 예화만 기억에 남습니다.

이러다 보니,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 듣는 사람의 용도가 달라집니다.

사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예화를 들어 설명하는데, 듣는 신자는 미워하는 사람을 괴롭히는데 사용하려고 합니다.

또 가정의 화목을 이야기하면, 그 말을 부부싸움에서 써먹을 생각을 합니다.

실제로 사소한 일로 부부싸움을 하다가, 괜히“심부님이 강론 때 뭐라고 하셨어? 당신 같은 인간이 어떻게 성당에 다녀? 아주 웃기지도 않아. 그럴 거면 성당에 가지마!” 하면서, 넘지 말아야할 선을 건드립니다.

신부는 그런 의도로 그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닌데, 둘 다 미사에 오지 않거나 한동안 냉담해 버리는 진짜 웃기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사제가 복음적 의도로 이야기한 것을, 정반대로 바꾸어서 세속적 처세에 유용하게 활용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자신이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고민만 더 세집니다.

이렇게 강론을 변질시키는 일은 다반사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로 어떤 분은 사제가 강론을 시작하면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도마 위에 올립니다.

“저 말은 맞고, 그 말은 아니고......,”

“적어도 미사 중의 강론이라면, 이러해야 돼. 그러니까 신부가 하는 말은 이런 선에서 그쳐야만 돼.......신부가 그렇게 말하면 곤란하지.”하고 토를 달고 평가하면서, 별로 아름답지 않은 자신의 세속적 기분이나 취향에 강론을 끼워 맞춥니다..............♣†[48-2회로 이어 집니다.] 

                             

          

  천주교 서울 대교구 중림동[약현]성당 주임 정훈 베르나르도 신부.


 

 

                 

                                    

                                      [주님 저 하늘 펼치시고:가톨릭 성가 47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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